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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슬픔에 관하여

[사진가의 펜으로 보는 세상]

슬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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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관하여


주말을 틈타 오랜만에 들판으로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이 평지를 걸을 때는 머릿속은 온통 생각이라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나는 취한 듯 답답할 때는 늘 여기를 찾는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항상 내가 마치 동물처럼 즐겨 가는 장소를 마련해 두었다. 그 것이 바닷가일 때가 가장 좋았었는데 지금은 불행히도 바다와는 먼 곳에 산다. 하여 오래 전의 그 시절과는 달리 그래도 바다와 가장 비슷한 느낌을 주는 대지를 찾게 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민들레는 잔디밭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러나 내가 눈이 간 곳은 작은 나무의자 아래에 돌 틈을 헤집고 나온 작은 민들레였다. 아마도 그는 한줌도 되지 않는 흙 사이에 뿌리 했으리라. 그렇지만 실은 그 곳이 가장 안전한 장소다. 평지에 자리한 민들레는 수시로 사람들에 의해 잘려 나가지만 바위틈에는 누구도 좀체 시선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이 바위틈으로 불어 올 때면 그 여린 몸을 흔들어 대는 모습에 나는 섞이지 못하고 대지에서 멀어진 나를 발견하곤 한다.


어릴 적 서울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 고향이었지만 지금과 달리 그 곳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산골동네였다. 동네의 모든 사람들의 직업은 모두 같았다. 그리고 땅을 조금 더 소유한 집은 있었어도 모두 가난했다. 동네에는 집집마다 소 한 마리씩은 키웠는데 이는 소가 주는 노동력 이외에도 몇 년을 키운 후에는 목돈으로 환원되기 때문이었다. 꼬마였던 내가 소를 몰고 들판으로 나가도 이 동물은 도무지 저항심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이 동물의 큰 눈과 마주 할 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눈에 가장 슬픔이 서린 동물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 아르헨티나에서 촬영된 동영상에서 이 동물들이 마지막 순간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높은 담을 곡선으로 길게 만들어놓고 소를 그곳으로 몰고 가며 결국에는 최후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없었지만 이들의 눈망울에 죽음을 직감하는 슬픈 모습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모딜리아니가 1917년에서 1919년까지 그린 잔느 에뷔테른느라는 그림들을 좋아했다. 그 그림에는 모딜리아니가 잔느를 향한 애정과 슬픔이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다. 이 잘생긴 화가는 그러나 지독한 가난과 언제나 함께였다. 그리고 40년에도 이르지 못한 그의 인생의 후반은 잔느와 함께였으나 가난은 그들을 묶었고 그 이유로 모딜리아니는 잔느가 보고 싶을 때 잔느의 집을 찾곤 했으나 잔느 부모의 반대로 인하여 늘 만나지 못하고 그 문 앞에 쪼그려있다 돌아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때는 모딜리아니는 이미 바람둥이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래도 사랑함은 슬픈 것이기에 병약한 모딜리아니가 죽자 이튿날 잔느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그 때 그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한다.


잊기 힘든 영화에서의 장면은 자끄 드미의 1965년 작품인 “쉘부르의 우산”의 마지막 장면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적한 주유소에 그 여주인공이 딸을 태우고 주유를 위해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슴속에 묻어둔 두 연인의 재회가 시작된다. 아마도 흰 눈은 그들에게 추억의 소환 도구이며 여주인공의 사무실이 따듯하다고 표현함은 어색함의 극복이 아니라 그들의 따듯한 기억의 상징일 것이다. 영화에서 그들의 헤어짐은 운명이었고, (남자 주인공의 군 입대, 그리고 전쟁의 상황) 이 둘의 재회는 극한의 아픔을 선사한다. 여주인공은 딸이 남자 주인공을 많이 닮았다고 말함으로 인하여 모든 상황이 정리된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처음 보게 될 딸과의 만남을 거부해야하는 현실에 처함을 안다. 회상하고 기억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만 내린 잔인한 선물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일정부분 슬픈 기억을 추억하며 살아간다.


삶은 비바람 속에서 대지를 홀로 걷는 것이다. 그러니 기실, 행복이란 단어로만 존재하며 삶은 언제나 슬픈 것이고 단지 조금 덜 슬픈 것이 가능 할 뿐이다. 이 슬픔이란 감정은 앞서 말했듯 기억하는 동물인 우리에게만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오래 오래전에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주로 걷다가 드는 생각의 일종이었던 그 것은 바닷가를 걸을 때 극심하게 내게로 왔다. 전환기에 있던 나는 길을 잃고 대지를 헤매던 시기였다. 삶은 온통 무가치한 것이었고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마음이 극심한 시절이었다. 잠재적으로 고등학교 때에도 그런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바닷가에 살던 그 무렵만큼은 아니었다. 잠재 되어있는 슬픔은 그 영화에서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극대화 된다. 지금은 만남이든 헤어짐이든 익숙해지고 많이 무뎌졌지만 그 때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는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내게 슬픔의 진리를 선사함에도 고마운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한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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