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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예술 21 ] 흑인의 저항 음악-재2

by 데일리아트

비밥 재즈와 포스트 비밥 시대의 저항 음악


비밥 재즈(Bebop Jazz)의 저항적 특성


비밥 재즈는 스윙 재즈의 과도한 상업화와 정형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저항의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다. 비밥 재즈를 선도했던 알토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Charlie Parker)는 혁신적인 연주 스타일로 재즈의 방향을 영구적으로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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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Parker(1920-1955), 색소폰 연주자


또 피아니스트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는 전통에서 벗어난 연주 스타일과 파격적인 화성 사용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며,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역시 최고의 연주 기량으로 후반기에는 라틴 재즈의 복잡한 리듬과 화음 도입하여 재즈 음악을 확장했다.


비밥 재즈 연주자들은 무대 뒤에서 춤과 여흥을 위해 연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빠른 템포와 복잡한 코드 진행 위에서 예술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한 자신들 만의 새로운 연주 스타일을 만들었다. 연주 외에도,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뮤지션들은 의도적으로 흑인과 백인 연주자들을 함께 밴드에 포함시켜 흑백 분리 정책에 대해 항의 했다.


또 많은 비밥 뮤지션들은 인종차별적인 공연장이나 호텔에서의 공연을 거부했으며 이전 세대의 재즈 뮤지션들이 보여주었던 '엔터테이너' 이미지를 거부하고, 보다 진지한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했다. 그런가 하면, 백인 연주자들에 대하여 자신들의 우월한 연주력을 과시하고 백인 연주자들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비밥 재즈는 재즈를 단순한 대중음악에서 고도의 기술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예술 형식으로 변모시켰다. 소규모 재즈 밴드가 큰 공연 홀에서 연주하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이 되었다. 또한 비밥 재즈는 재즈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인기를 얻으며, 인종 간 문화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나아가 쿨재즈(Cool Jazz), 하드밥(Hard Bop)과 같은 다른 스타일의 재즈의 길을 열어, 미래의 로큰롤, 힙합 등 팝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도 비밥은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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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lonious Monk(1917-1982), 피아니스트


하드밥(Hard-bop) 시대의 저항 운동


하드밥 재즈는 비밥의 복잡성을 유지하면서도 블루스와 가스펠의 요소를 가미하여 대중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운드를 특징으로 한다. 이 시기에 여러 중요한 흑인 저항 운동 사례가 있었다. 1960년 2월 1일, 노스캐롤라이나 A&T 주립대학의 흑인 학생 4명이 ‘그린즈버러 울워스’ 백화점의 ‘백인 전용’ 런치 카운터에서 ‘앉아있기 시위(Sit-in Movement)’를 시작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인종 분리 정책 철폐를 요구했던 중요한 비폭력 시위로 기억된다. 그리고 1961년 5월, 흑인 7명과 백인 6명이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ders)’라 이름 붙여진 버스에 나눠 타고 순례를 시작했다. 그러나 50여 명의 백인 우월주의 단체, ‘쿠 클럭스 클랜(KKK)’ 단원이 참가자들을 폭행하고, 버스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명의 시위자가 살해당했지만, 경찰은 시위 자체가 ‘불법’이라며 참가자들을 구속했다. 시위의 반향은 갈수록 커졌고, 그해 여름 미국 전역에서 1,000여 명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결국 케네디 행정부는 공공시설의 차별을 철폐하고 분리 사용을 위법화하는 조처를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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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Roach(1924-2007), 재즈 드러머


드러머 맥스 로치와 아트 블레키는 각각 위의 사건을 규탄하고 응원하는 앨범을 발표했다. 드러머 맥스 로치의 <Freedom Now Suite>가 1960년 12월 Candid Records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미국의 인종차별과 민권운동을 주제로 한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1959년부터 작사가 ‘오스카 브라운 주니어’와 작업을 시작했으며 ‘그린즈버러 앉아있기 시위’ 등 인권 운동의 영향을 받아 기획된, 1963년 노예해방선언 100주년 기념 공연을 위해 연주되었다.


앨범의 세 번째 트랙 ‘Triptych: Prayer / Protest / Peace’에서는 맥스 로치의 아내이자 재즈 보컬리스트인 애비 링컨(Abbey Lincoln)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치 이 모든 흑인에 대한 억압과 그 저항의 목소리를 한 곡에 표현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드밥 재즈를 대표하는 그룹 ‘The Jazz Messengers’의 리더이자 드러머인 아트 블래키는 <The Freedom Rider>라는 7분 이상의 드럼 솔로 곡을 통해 시위에 참가했던 프리덤 라이더, 즉 변화의 기수들이 겪었던 폭력과 저항,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변화에 대한 희망 등 시민권 운동의 정신을 표현했다. 격정적인 드럼 사운드만으로 표현하는 이 음악은 훗날 많은 뮤지션들의 사회 의식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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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Blakey(1919-1990), 재즈 드러머


1964년 여름, 흑인 유권자 등록을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미시시피주로 갔다가 3명의 민권운동가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1965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의 투표권 행진이 있었다. 이러한 저항 운동들은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 제정 등 중요한 법적 성과로 이어졌고,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철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리재즈, 아방가르드 재즈에 깃든 저항 정신


오넷 콜맨은 프리 재즈 운동의 선구자로, 기존의 화성 구조와 리듬 체계를 벗어난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추구했다. 그는 특정 사건에 대하여 작곡을 하거나 연주하지 않았지만, 미국 역사에서 흑인이 받아온 억압과 차별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대화 방식을 연주에 도입했다. 그의 음악은 진보적인 예술 행위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와 새로운 소통 방식을 제시해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 등, 많은 뮤지션들의 깊이 있는 연주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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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nette Coleman(1930-2015), 색소폰 연주자



1956년 아칸소 주지사 오빌 포버스의 인종차별적 행위에 대한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의 대응은 재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치적 항의 퍼포먼스로 평가받고 있다. '포버스의 우화(Fables of Faubus)' 사건의 배경은 이러하다. 1957년 9월, 오빌 포버스 주지사는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 9명의 흑인 학생이 입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 방위군을 동원했다.


이는 인종 분리 정책이 위헌으로 선언된 이후에도 학교 통합을 거부하는 행위였으므로 찰스 밍거스는 이 사건에 분노하여 <Fables of Faubus>라는 곡을 작곡했다. 1959년 앨범 'Mingus Ah Um'에 처음 녹음되었으나, 가사가 없는 버전으로 발매했으며 이듬해 ‘Charles Mingus Presents Charles Mingus’ 앨범에서 가사가 포함된 완전한 버전이 발표됐다.


이 곡은 풍자와 조롱을 통해 포버스 주지사와 인종차별 정책을 비판했으며 밍거스와 드러머 대니 리치먼드의 '주고받기 형식(call and response)'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복잡한 화성과 리듬, 강렬한 연주 스타일로 프리재즈 시대의 어법을 사용하여 표현했다.


이 곡은 1960년대 민권운동의 정신을 선구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재즈 역사상 가장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화두로 삼은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찰스 밍거스는 그 외에도 <Meditations on Integration>이라는 곡을 통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통합과 평등에 대한 비전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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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Mingus(베이시스트, 1922~1979)


존 콜트레인은 <Alabama>를 발표하며 KKK단이 자행한 1963년 9월 15일 버밍엄의 16번가 침례교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숨진 4명의 흑인 소녀의 죽음을 추모했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열리던 인권운동 시위를 경계하기 위해 이 같은 끔찍한 사고를 저질렀다.





존 콜트레인은 1964년 마틴 루터 킹과 시민권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8번의 집회에 참여해 연주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그가 발표한 ‘A Love Supreme’ 앨범은 재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모달재즈, 하드밥, 프리 재즈 등 다양한 스타일을 융합한 혁신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내면에 깔린 종교적, 영적 신념이 음악으로 표현됐다는 데서 큰 의미를 둔다. 더욱이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에 발표되어, 흑인들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대변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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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Coltrane(1926-1967), 색소폰 연주자


비슷한 시기 재즈 보컬리스트 니나 사이몬은 <Mississippi Goddam>을 발표하며 1963년 버밍엄 교회 폭탄 테러와 메드가 에버스(Medgar Evers) 암살 사건 희생자를 추모했다. 한 시간 만에 완성했다는 이 곡은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분노, 울분과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 남부 여러 주에서 금지곡이 되었을 정도이다.


또 그녀가 발표한 <Four Women>은 1966년 발매된 앨범 ‘Wild Is the Wind’에 수록된 곡으로, 미국 흑인 여성들이 겪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실랄하게 비판한 노래이다. 발매 당시 일부 흑인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을 거부할 정도로 논란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항 운동의 중요한 노래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곡은 많은 아티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2000년 탈립 콸리(Talib Kweli)가 리메이크하고 2017년 Jay-Z가 샘플링하는 등 현재까지도 그 저항의 메시지는 울려퍼지고 있다.


‘Four Women’( Nina Simon)


My skin is black (내 피부는 검은색이야)


My arms are long (나는 팔이 길어요)


My hair is woolly (내 머리카락은 털이 덥수룩해요)


(중략)


Between two worlds (두 세계 사이)


I do belong (나는 속한다)


My father was rich and white (내 아버지는 부자였고 백인이었어)


He forced my mother late one night (그는 어느 날 밤 늦게 어머니에게 강요했습니다.)


니나 사이몬은 그 외에도 흑인들의 자부심과 희망을 고취하는 <To Be Young, Gifted and Black>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암살에 대한 애도를 담은 12분 52초 길이의 곡 <Why? (The King Is Dead)>등을 발표했다.


재즈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루이 암스트롱은 ‘엉클 톰’, 그러니까 백인에게 순응하는 마음씨 좋은 흑인 아저씨로 인식되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천재적인 재즈 연주자이면서 만능 엔터테이너로 항상 무대에서 유머와 코믹 연기를 펼쳐 보여 큰 인기를 얻었다.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라는 신조를 지니고 있었으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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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rmstrong(1901-1971), 트럼펫 연주자


그런 루이 암스트롱이 1957년 9월 미국 국무부의 소련 순회공연 요청을 거절한 유명한 사건이 있다. 앞서 찰스 밍거스의 사례에서 언급했던,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학교 인종 통합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고 있을 때 주지사 오벌 포버스가 주 방위군을 동원해 9명의 흑인 학생들의 중앙 고등학교 입학을 막으려 했고,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암스트롱은 국무부의 소련 순회공연 요청을 거절하며 강력하게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러시아 사람들이 내 나라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볼 텐데, 난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동안 인종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속내를 비치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런 강경한 태도 표명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며칠 후 연방군을 리틀록에 파견해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보장했고, 이는 암스트롱의 발언 영향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루이 암스트롱은 어느 방송에 출연해 "그들은 내가 행진하면 내 입을 때릴 것이고, 입이 없으면 나는 트럼펫을 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흑인이고 행진한다면 그 분도 때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분야에서 아프로-아메리칸들이 겪었을 인종차별이 새삼 가슴에 사무쳐오는 말이다.


그들은 고통과 상심의 토양에서 재즈 음악을 탄생시켰다. 니체가 “비극은 삶에 대해 최고의 긍정을 하는 예술"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가장 슬픈 역사를 통해 탄생한 블루스와 재즈 음악을 들으며 매 순간 끝없는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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