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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문화사 16] 다방 이야기 3

by 데일리아트

1, 2편에서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생긴 다방의 역사와 1930년대 시인 이상이 개업한 제비다방 이야기, 다방의 여자 종업원 권영희 이야기를 썼다. 이상과 권영희 사이에 끼어든 문인 정인택. 결국 권영희는 정인택에게 시집을 간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원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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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과 권영희의 결혼 사진


이상은 금홍이와 권영희(권순옥에서 권영희로 개명)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친구인 정인택에게 권영희를 빼앗겼다. 정인택과 권영희 결혼식은 정릉 골짜기 홍천사에서 치뤘는데 그 결혼식 사회자가 이상이었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돌고 도는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어쩌면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 정인택, 권영희의 사랑의 각축전이, 정인택과 권영희의 결혼으로 거의 끝날 즈음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한다. '오갑빠( 御河童, 단발머리)' 머리에 지팡이를 든 안경 쓴 남자, 「천변풍경」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다. 사실 1930년대의 지성사를 이야기할 때 구보 박태원을 빼고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인, 화가 등은 이미 일본에서 유학을 다녀온 시대의 인텔리였다. 이들의 중심에 박태원이 있었다.


평소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던 권영희는 이미 1930년대에 러시아의 국민 소설가 막심 고리키의 저작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인택과 결혼하고 6·25 전쟁이 터졌다.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권영희는 남편,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다. 그런데 월북하는 과정에서 남편 정인택이 안타깝게 병사를 하고 말았다. 권영희의 운명은 어찌됐을까? 북녘 땅, 낯선 곳에서 홀로 두 딸을 키우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사람이 한둘이었을까? 북에는 남에서 월북한 홀아비들이 수두룩했다. 박태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박태원과 권영희는 이상을 통해서 이미 아는 사이였다. 박태원은 동생 화가 박문원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취해 있었는데 전쟁 상황이 역전되었다. 9·28 서울 수복 때 미군과 국군이 다시 서울로 진격해 들어왔다. 박태원은 평양 시찰단 일원으로 가족에게 변변히 인사도 못하고 북으로 간다. 곧 돌아오겠다는 말은 시간이 갈수록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 월북 과정에서 남편을 잃은 권영희. 그녀는 낯선 북녘땅에서 박태원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박태원의 장남 박일영의 글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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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후의 박태원. 오른쪽이 권영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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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환갑상을 받는 박태원


"그 후 나는 결심을 굳히고 직장에 사표를 내고 도선이의 기숙사 입사 수속을 끝낸 다음, 해 지기를 기다려 마당에 한창 제철을 자랑하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한 묶음을 꺾어 아이(은이)를 안겨 앞세우고 아버지를 찾아갔소."


이 무슨 이야기인가? 박영희가 자신의 딸을 앞세우고 박태원에게 갔던 것이다.


"오셨군요.오셨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거 꽃!“


"은이야,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야"


(박일영, 『소설가 구보 씨의 일생』, 문학과 지성사, 255쪽)


권영희가 코스모스를 꺾어 들고 이미 자신에게 프로포즈를 한 박태원에게 응낙하러 꽃을 꺾어 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장면이 아름답다. 아니, 너무 슬프다. 이들이 전개하는 사랑 이야기에 누가 뭐라 말할 것인가. 이미 남쪽에는 박태원에게 금쪽 같은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상태였다. 박태원의 부인 김정애는 숙명여전을 수석 졸업하고 배구 선수로도 활약한 재원이었다. 박태원은 고모 박일영을 따라 숙명여전 학생들이 하는 영어 연극을 보러 갔다가, 주인공 김정애에 마음을 빼앗겨 어렵게 결혼을 했다.


김정애는 북에서 밀고내려온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여맹'의 부탁으로 옷을 빨아준 것이 9·28 수복 후 문제가 되었다.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가까스로 감형되어 5년을 복역했다. 박태원과의 사이에 2남3녀를 두었다. 첫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이름붙인 일영, 둘째라 해서 재(再)자를 넣어서 재영, 눈 올 때 태어나서 설()자를 넣은 설영. 둘째 딸은 소영, 막내는 은영이었다. 박태원의 차녀 소영의 아들이 그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다.


북에서 박태원은 권영희와 재혼해서 새로운 살림을 꾸렸다. 정인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정태은은 계부 박태원을 좋은 아버지로 기억한다. 박태원은 말년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실명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창작의 열정을 내려 놓지는 않았다. 권영희는 병 중인 남편 박태원을 극진히 간병했고, 박태원은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 2부와 『갑오농민전쟁』 1~3부를 북에서 집필한다. 권영희는 남편의 구술을 기록해서 책으로 내었다. 1986년 박태원이 사망하자, 『갑오농민전쟁』 결말을 직접 창작해 책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박태원은 북에서 권영희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 남한에서 김정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소영을 잊지 못해, 북에서도 딸의 이름을 소영이라고 했다.


1930년대. 다방과 카페 문화가 경성에 넘쳐났던 시기이다. 일제 강점기 다방과 카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다방은 커피를 파는 곳이요, 카페는 여성 점원을 고용해 주류도 판매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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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피난 시절의 이중섭, 박고석, 한묵


1930년대 이후 우리 문화사에서 다방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산 피난지에서였다. 6·25가 터지자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다방에 모여 들었다.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도 전에, 자신의 생사를 고민해야 했다. 부산에서 더 밀리면 어디로 갈 것인가?


「서울은 만원이다」를 쓴 소설가 이호철은 북한의 의용군에서 도망나와 유엔군 경비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시대는 그들에게 이념을 강요했다. 본인이 누구인지, 내가 어느 편인지 정체성도 헷갈리던 시기였다. 이중섭도, 박고석도, 김병기도 북이 싫어 내려왔다. 밀려 밀려 내려온 피난지 부산이 만일 북에 점령당하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불안한 그들은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부산 광복동, 문총 2층에 자리한 다방 '밀다원'은 그들의 아지트였다. 김동리는 「밀다원」이라는 단편소설에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바다에서는 갈매기 떼처럼 퍼덜거린다. 앞뒤에 죽음과 이별을 두고 좌우에 유랑과 기한을 이끌며, 그래도 아는 얼굴, 커피 한 잔이 있어서 즐겁단 말인가, 그래도 즐겁단 말인가, 무엇이 즐겁단 말인가 하고, 중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이 말을 끄기 위하여 또 한 번 한숨을 길게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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