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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고소한 과자 냄새 풍기던 동네

[서소문 밖 첫 동네]

매일 아침 과자 박스가 중림동에 산을 이루었다
 
초창기에 발매된 크라운제과 산도

고소한 과자 냄새 풍기던 동네


회사에서 퇴근할 때 청파로를 따라가다가 용산 넘어가는 고가를 타면 고소한 과자 냄새가 난다. 고가 아래에 있는 오리온제과 공장에서 풍겨 나오는 과자 굽는 냄새다. 어떤 때는 가다 말고 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 사 먹으며 퇴근한 날도 있다. 과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향수를 불러온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과자공장이 있었다. 일정한 시간마다, 과자를 구울 때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다. 이 공장은 아마도 과자의 형태를 잡아주는 틀 없이 오븐에 반죽을 적당하게 올려 구운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과자의 형태도 제 각각이었다. 과자를 굽다가 깨어진 것, 모양이 이상한 것, 많이 구운 것 등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 많이 나왔다. 바가지를 들고 가면 이런 조각 과자들을 거의 공짜 수준으로 팔았다. 조각난 과자라도 금방 구운 것이어서 바삭바삭하고 맛도 좋았다. 불이 과해서 검게 탄 과자는 오히려 더 딱딱해서 식감도 좋았고 맛도 구수했다. 지금은 그런 즉석에서 구운 과자를 맛보기 힘들다. 센베이 과자는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굵은 설탕을 둘린 과자는 먹을 때 혀가 까칠해지기도 했다.


과자 공장의 형들은 나하고 놀다가 길거리에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계속 쳐다보기가 민망한지 공장으로 올라가 창문을 열고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내려다 보았다. 그 형들은 어디에 있는지...


10여년 전 '국희'라는 드라마가 TV를 달군 적이 있다. 몇몇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희는 우리나라의 토종 과자 회사 '크라운제과'를 모델로 만든 드라마이다. 드라마 종영 이후에도 극 중의 과자를 본 떠 '크라운 국희 땅콩샌드'라는 과자를 생산하여 화제가 되었다. 크라운제과의 오늘을 있게 한 과자가 산도이다. 산도는 샌드의 일본식 발음이다. 샌드는 샌드위치의 줄임말. 그러니 산도는 비스켓 사이에 크림을 바른 '과자 샌드위치'이다. 산도는 먹는 방법이 있다. 봉지를 뜯으면 과자가 나온다. 비스킷을 떼어내면 달콤한 크림이 나온다. 먼저 그 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아서 맛을 보고 과자를 먹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과자 공장은 모두 용산에서 시작했다. 용산은 대표적인 일본인의 거주지였다. 용산역 기준으로 왼쪽에 모토마치(元町,원효로)가 일본인의 거주지로 발달해 있었고 오른쪽, 지금의 미군 기지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 용산에 있는 제과 회사들은 군부대에 건빵과 캐러멜, 별사탕등을 납품했다. 해태제과의 모체인 영강제과는 일본군에 양갱과 캐러멜을 납품 했다. 영강제과(남영동), 풍국제과(삼각지), 경성제과(후암동) 등 대표적인 제과 업체들은 용산역을 중심으로 좌우에 포진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과자는 일본인과 일본군에게 납품하기 위해 생산한 것이다.


국내 적산 기업이 아닌 토종의 제과 회사인 크라운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제과 회사인 해태제과를 인수했다. 이 회사에서 지금까지 팔리고 있는 것이 최장수 브랜드 '양갱'이라고 한다. 일제 시기의 풍국제과는 오리온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1967년에 한국에 진출한 롯데제과를 비롯해서 1990년대까지 국내의 3대 제과 기업은 일본의 기업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

영일당제과가 있던 중림동 현재 모습

크라운제과의 모체가 되는 영일당제과소(永一堂製菓所)가 중림동에 있었다. 중림동 181번지, 지금은 허름한 공장이 들어서 있다. 1947년 해방 이후, 전라남도 해남에서 서울에 올라와 양복 수선공으로 일하던 윤태현은 제과 업계의 미래를 밝게 보고 중림동에 제과점을 차린 것이다. 신혼 시절 중림동의 한옥 부엌 한 칸을 전세 내어 시작한 것이 영일당제과이다.


아는 친구의 집 부엌을 세내어 어렵게 마련한 과자 굽는 오븐을 설치하고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크라운제과를 세운 윤태현의 평전, <식食은 생生이다>를 보면 우연히 받은 미국 C레이션(C Ration) 깡통 안에 든 미국 비스킷을 보고, 그것과 같은 과자를 만들 결심을 했다고 한다. 샌드 비스킷을 만들기 위해서는 긴 터널식 오븐과 샌드 기계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비스킷을 만드는 기술이 전무했다. 당시 제과업계의 기술은 손쉽게 만드는 캐러멜과 사탕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방산시장에서 기계 부품을 사다가 손수 터널식 오븐기를 만들었다. 비스킷은 40미터가 넘는 오븐을 설치하여 골고루 열을 가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윤 회장은 부족한 부품은 고물상을 뒤져 가지고 와 이리저리 맞춰서 외부의 도움 없이 생산 시설을 꾸렸다. 이 비스킷에 달콤한 크림을 넣어 '크라운 소프트산도'가 탄생한 것이다.


산도가 성공하자 이 제품을 구하려는 상인들의 행렬이 중림동 언덕에서부터 서울역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당시 산도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의 꿈은 하루에 사과상자 1천 박스 분량의 과자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나무 박스가 수북하게 중림동 언덕에 산을 이루었다. 마침내 1967년 9월18일 목표를 달성했다. 크라운제과는 지금도 이 날을 창립기념일로 지킨다고 한다. 하루에 들어가는 연탄의 양만도 540장이었다. 24시간을 온전히 가동해도 주문량을 맞추지 못해 원효로에 제2공장을 설치했다.


산도의 성공으로 크라운은 일약 제과 업계를 석권하게 되나 1961년 전기 오븐의 누전 사고로 중림동 공장이 전소되면서 크라운의 중림동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지금도 인터넷을 보면 중림동의 고소한 과자 냄새를 추억하는 분들이 많다. 과자 하나에도 이런 놀라운 노력이 숨어 있으니, 비스킷 한 조각, 사탕 한 알을 먹더라도 맨손으로 놀라운 신화를 이룬 이들의 노력을 알 일이다.

오리온 제과의 전신 풍국제과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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