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용기와 인내, 동료애는 빛을 발한다. 1915년 프랑스 북부, 얼어붙은 전장에서 추위와 싸우던 병사들. 영국 화가이자 군인이었던 ‘에릭 케닝턴(Eric Kennington, 1888-1960)’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했다.
라벙티의 켄싱턴 대원들(Kensingtons at Laventie)
라벙티의 켄싱턴 대원들(Kensingtons at Laventie), 1915 /출처: 영국전쟁박물관 소장
검은 두건을 쓴 화가 본인
이 그림은 1차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을 치르던 영국 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1차대전 당시 참호 형태. 참호는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었다. 특히 저지대에 있는 참호는 고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더욱 비참한 상황이 되곤 했다. /출처: 세계의 병기 도해, 이미지프레임
병사들은 혹한의 전장에서 며칠 밤을 잠도 자지 못한 채 싸웠고, 이제 후방으로 이동 명령을 기다리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하지만 그림 속 병사들의 표정에는 피로감뿐만 아니라, 결연한 의지도 엿보인다. 차가운 눈밭에 선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온 작은 영웅들이다.
그들이 어깨에 멘 소총은 당시 영국군의 표준 제식 소총이었던 ‘리엔필드 소총(Lee-Enfield)’이다.
리엔필드 소총 /출처: 총백과사전, HB
1895년부터 영국군이 사용한 이 소총은 속사 능력이 뛰어나고, 믿을 만한 내구성을 갖춘 무기였다. 그림 속 병사들 역시 총이 얼어붙지 않도록 붕대로 감싸 놓았다. 이는 혹한 속에서 병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생존을 준비했는지를 보여준다.
리엔필드소총 /출처: 무기의 세계사, NODE MEDIA
‘리엔필드 소총’은 10발들이 탄창을 장착해 당시 다른 국가의 소총보다 많은 탄약을 장전할 수 있었고, 빠른 속도로 사격할 수 있어 참호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앤필드 소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매드 미닛(Mad Minute)' 훈련으로 유명했다. 이는 숙련된 사수가 1분 동안 15~30발을 정확하게 사격하는 기술로, 적에게 자동소총에 맞먹는 화력을 퍼부을 수 있었다.
영화 '1917'에서 블레이크 상병과 스코필드 상병이 휴대한 리엔필드 /출처: Shepherd express
1915년 1월, 프랑스 ‘라벙티(Laventie)’ 전선의 겨울은 영하 20도까지 떨어졌고,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참호는 얼어붙었고, 땅은 진창이 됐다. 당시 26세였던 케닝턴 역시 이 전장에 있었다. 그는 ‘런던 연대 켄싱턴 대대 C중대 7분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나, 강추위 속에서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한 채 행군을 이어가다 결국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발이 심하게 감염되어 절단 위기까지 갔고,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후송된 그는 전장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전우들을 위해 붓을 들었다.
그가 그린 '라벙티의 켄싱턴 대원들'은 병사들의 지친 모습뿐 아니라, 그들이 품고 있던 불굴의 의지를 담아냈다. 누군가는 땅을 응시하고, 누군가는 멀리 바라보지만, 그들의 눈빛은 공허하지 않다. ‘리엔필드 소총’을 든 채 거친 전장을 버텨낸 그들은 패배한 군인이 아니라, 싸워 낸 군인들이었다.
그림을 보면 마치 100년 전 참호의 차가운 공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버텼던 병사들, 그들이 품었던 용기와 희생이 우리 앞에 서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동료애를 이야기하는 기록이다.
100년 전 눈 속에서 서로를 지키던 병사들의 눈빛은, 지금도 여전히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묻는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미술 속 총 이야기 ②] 혹한의 전장, 병사들의 눈빛이 전하는 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