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_유화_25x19_1954 화재 후에 돌려 받은 초기 그림
“피난민 대열에 섞여서도 기를 쓰고 그렸던 작품들, 숲속과 바닷가를 전전하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렸던 작품들, 나무를 해서 배를 채우고 살며 틈틈이 물감을 사 그렸던 작품들, 포탄을 뚫고 적진을 오가는 와중에 그렸던 그림들까지, 화마는 남김없이 삼켜버렸습니다.”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
1960년 4월 19일. 운명은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수백 점의 그림들을 깡그리 허무한 재로 만들고 한인현은 10년 전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던 그날처럼, 다시 혈혈단신 혼자가 되었다.
아시아반공연맹은 그가 다닌 첫 직장이었다. 6‧25에 그림 그리는 병사로 참전했던 한인현은 그 인연으로 이곳에 취직해 홍보 담당으로 일할 수 있었다. 오근 사무총장은 그의 그림을 좋아해서 반공연맹 안에 특별히 작업실을 마련해 주고 이 젊은 화가가 마음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림을 계속하고 싶었던 그에게 생애 첫 개인 작업실이 생긴 것이다.
자화상_색연필_31x22_1966, 물난리 직후 그린 그림
그는 그 시절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했었다고 회상했다. 낮에는 밤을 기다리며 즐겁게 일할 수 있었고, 밤에는 내그림을 그릴 수 있어 즐거웠다.
비록 그 행복은 길지 못했지만.....
4‧19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대가 연맹 건물 3층에 있었는데, 데모대가 아시아반공연맹으로 진입해 불을 질렀던 것이다. 종군하며 그렸던 그림을 포함해 천 점에 육박했던 애꿎은 그의 그림들은. 월남하여 10년 간 거의 밤을 새며 그려냈던 청년화가 한인현의 영혼의 기록들은 이 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사정을 딱하게 여긴 지인들이 돌려준 작품이 5점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야말로 먼지처럼, 재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모두 9백80여 점의 분신들이 사라져 버렸는데 나는 한동안 불타 없어진 그림들을 생각하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내 영혼이 사라진 것 같아 몇 날 몇 달 동안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곤 했습니다.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
그러나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상실감도, 몇 달간의 긴 슬픔도 결국 그림을 향한 젊은 화가의 애틋한 갈망을 꺾어내지는 못했다.
무제_종이,먹물,나무젓가락_25x37_2002
무제_종이,먹물,이쑤시개_13x18.5_2008
“나는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젊은이였던 것입니다. 다시 그리면 된다고 나는 나를 곧추세웠습니다. 다른 눈으로 좀 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라는 뜻인지도 모른다고 여기기도 했지요. 젊은 화가라면 당연히 그런 기백쯤이야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
그는 효창동에 방을 하나 얻어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시작했다.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고 그림에 몰두하는 생활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5년여 그린 작품은 어느새 80여 점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얼마나 더 담금질하려던 것일까.
피난_수채_54x38.5_1961, 물난리 통에 높이 걸려 있어 살아 남은 그림
1965년의 장마는 그 80점의 열매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자취방에 쌓아 놓았던 그림들은 온통 물에 잠겨 고작 몇 점의 작품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한인현 화백은 그래도 5년 전, 불길에 빼앗겼던 작품들보다는 숫자가 덜했고 한 번 경험이 있었던 덕에 충격은 덜했다고 회고했다.
5년 동안 열심히 그려온 경험은 무엇보다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거이자 용기가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일도 겪었는데, 더구나 아직 내 나이 서른 네살 밖에 안되었다, 나는 다시 붓을 잡았고, 하루하루 밤을 새우다시피 화폭을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인현)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의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이 집착으로 발전되어간 이유에도 한 몫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스캐치_수채_35.5x17_1966
그리고 한편, 이 시기를 겪으며 한인현의 화풍에는 서서히 변화가 시작된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비비드하고 다양했던 컬러가 점차 사라지며, 색과 선이 단순하고 깊어진다. 그가 40대에 이르러서는 ‘개흙색’이 작품의 대표적인 색으로 나타나는데, 어린시절 고기잡던 추억을 떠올리며 찾아낸 우리 땅의 색이 그것이다.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도 그림에서 점차 또렷이 보여지게 된다. 내용과 기법에서 그만의 힘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찬 겨울밤 창원에서 마산으로_먹, 이쑤시개_30.5x22_2007
“모든 것은 호사다마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내 그림들이 온전할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 퍽 게으른 화가가 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어떤 운명의 가르침이 당신의 그림들은 모두 허접쓰레기 같으니 다 태워 없애 버리라고 그 난리를 겪게 했던 것인지 누가 압니까.”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
가족을 잃고, 그림을 잃고. 실향과 상실의 가혹한 반복이, 결코 끝없이 움트는 예술과 삶에의 의지를 멈출 수 없음을. 아니 더욱 아름답고 짙게 성장시킬 수 있음을 증명하는 한인현의 온 생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⑤] 바보 화가 한인현-화마가 삼켜버린 나의 작품 < 인터뷰 < 뉴스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