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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에게 들려주는 서울 이야기 ⑭]운현궁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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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이재영 촬영


안국역 근처에 가면 운현궁(雲峴宮)이 있다. 누가 살던 곳일까? 궁(宮)이라면 왕이 살던 곳인가? 아니다.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살던 곳이다. 우리는 보통 왕이 살던 곳을 궁(宮)으로 부른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궁(宮)에서는 왕만 살았던 것이 아니다. 왕족을 비롯한 지체 높은 사람들이 살던 공간에도 궁(宮)을 붙였다.


이곳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이다. 운현궁 앞에는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기후를 측정하는 서운관(書雲觀)이 있어 운현(雲峴)이라 불려 운현궁이라 한 것이다. 원래의 크기는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관,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 일대까지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어 지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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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그림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26대 왕인 고종이다. 12세까지 성장한 곳으로 고종의 잠저로도 불린다. 고종은 철종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오르게 되자 생부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된다. 부자지간에도 왕권의 다툼이 있는 지, 권력의 맛을 본 흥선대원군은 끝까지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 했다.


“섭정이 무엇인지는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당시 고종은 몇 살에 임금이 되셨어요?”


작은 손자가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왕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대원군에게 많은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져, 결국 12살에 고종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두 사람이 관계는 끝내 회복하지 못한다.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무런 왕래도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타계했을 때에도 고종은 끝내 찾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거짓말처럼 보인다. 고종의 잠저이면서도 아버지의 권력을 향한 욕심이 끝없이 펼쳐졌던 역사적 공간이다.


이곳은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 군대 별기군과의 차별도 서러운데, 구식군에게 지급하는 봉급미에 모래를 섞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성난 군인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은 이곳 운현궁에 몰려들어 흥선대원군에게 협조를 구했다. 임오군란의 실패로 대원군이 청나라의 텐진으로 납치되기 까지 그의 권력에 대한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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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이로당 앞의 시민들 이재영 촬영


흥선대원군이 거처할 당시에는 운현궁이 왕이 살던 궁궐에 견줄 만큼 웅장했지만 지금은 많이 축소 되었다. 사랑채 노안당과 안채 노락당, 별당인 이로당이 있고, 바깥쪽에 운현궁 유물전시관만이 있다. 운현궁의 사랑채는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으며 노안당은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노락당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이 있고 방 앞뒤로 툇간을 둔 궁궐내전 평면구성으로 되어 있다. 특이 할만한 것은 이곳에서 고종과 명성황우가 혼례를 치루었다.


“몇 살인데 결혼을 했어요?”


“당시 열 네 살이었다.”


작은 손자가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큰 손자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엄지손가락을 쓰윽 내밀었다.


“형아, 곧 장가가야겠네.”


“뭐라고? 너나 장가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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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유물전시관 이재영 촬영


손자들의 깔깔거리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운현궁의 별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당 이노당은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폐쇄된 건물로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었던 은밀한 건물이다.


특히 유물전시관은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후기 사회상을 알 수 있도록 흥선대원군이 사용하던 유물과 생활도구 등을 전시해 둔 곳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가례를 사용했던 운현궁의 생활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운현궁의 반대편을 보니 서양식 건물 양관이 있다. 이곳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 이우(李鍝, 1912~1945)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이우는 10살이 되던 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종군했으나, 히로시마 피폭으로 33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황태자이다. 그는 누구보다 기개 높게 살았고,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컸다. 몇년 전 얼짱으로 알려져 인터넷에 그의 얼굴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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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차남 이우 출처: 인터넷 커뮤니티


해방의 기쁨으로 들떠있던 1945년 8월 15일, 경성운동장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뤄졌다. 조금 더 살았다면 해방 정국에서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운현궁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과욕을 부렸던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독립을 맘 깊이 희구한 젊은 왕족이 함께 숨쉬는 공간이다. 지금은 너무도 한산하여 이들을 기릴만한 아무것도 없다.


운현궁관람은 무료이며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출구를 나와 70m 1호선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를 나와 낙원상가를 지나 안국역쪽으로 300m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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