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밖으로 나온 악녀들' 을 연재하고 있는 이수정 칼럼니스트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애상담소: 예술에 길을 묻다'라는 다소 재미있는 주제의 칼럼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일어날 법한 연애의 어려움을 예술로 풀어가는 방식입니다. 현재는 가상의 인물의 고민을 풀어가지만 이후에 독자들의 연애 고충을 직접 받을 계획도 있답니다. 이수정 칼럼니스트의 고민 상담에 많이 귀 기울여 주세요.(편집자 주)
Q: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후반 ‘흙수저남’입니다. 제 닉네임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꽤 어렵게 자랐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흙수저 친구들마저 저를 동정할 정도였지요. 홀어머니와 찜질방을 전전하기도 하고, 친척들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도 먹어 봤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못된 사람을 만나 고생도 해봤지만, 좋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형편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작은 임대아파트를 얻어 어머니와 도란도란 살아갑니다. 틈틈이 공부해 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통과했고요. 비록 임금은 적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겠지만 제게는 노력 끝에 얻은 소중한 생활이랍니다.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고 성실하게 지내온 제가 대견스럽네요. 이런 제게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이제껏 제게 연애란 사치였습니다. 몇 년 전, 잠깐 여자친구를 만났지만, 현실적 문제로 헤어졌습니다. 한 번 데이트할 때 쓰는 비용이 제 한 달 용돈에 맞먹었으니까요. 여자친구 생일에도 번듯한 선물 하나 마련하기 힘든 제 처지에 자괴감을 느꼈지요. 지금껏 연애와 결혼은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흙수저 부모는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인터넷 게시물을 보면 마음이 뜨끔합니다. 요즘 부쩍 외롭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를 스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남은 인생을 역전하기란 힘들 듯합니다. 저는 미래에도 지금처럼 힘겹게 살아갈 테고, 제 자식에게도 비슷한 환경을 물려주겠죠.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영화 '러브 액추얼리' 출처/네이버 영화
A: 안녕하세요, 흙수저님. 일단 열심히 살아온 당신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특히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태도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힘든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님 말고도 많지만,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을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조차 남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끼곤 합니다. 자중자애(自重自愛)란 그처럼 갖기 힘든 자세랍니다. 비록 님의 부모님은 물질적 풍요는 물려주지 못했을지언정, 무엇보다도 값진 마음가짐을 물려주셨군요.
많은 청년이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치솟는 집값과 물가, 계급 이동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상이지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곳이랍니다. 제도와 사회 구조가 잘못되었다면 조금씩 바꿔나가야겠지요.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사람은 웃고 즐기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니, 사랑은 포기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랍니다. 당신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넘치게 받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꼭 가족이나 연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친구나 이웃, 기르는 개나 고양이, 혹은 종교나 학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어도 좋습니다.
영화 '러브 액추얼리' 한 장면 사진출처: unsplash.com
식민지, 수용소, 심지어 전장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은 싹텄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애인을 구했을 리 없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는 눈길과 오가는 몇 마디 말속에서 사랑은 싹텄겠지요. 당장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보살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크(Victor Frank)는 2차 대전 중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아내 역시 여자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빅터 프랭크는 사랑하는 그녀를 떠올리며 수용소 생활을 버텼다고 고백했습니다. 불행히도 그의 아내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사랑이 빅터 프랭크를 구원했지요. 빅터 프랭크는 종전 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잃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에게 삶의 의지를 주었습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엮은 옴니버스 작품입니다. 감독 리처드 커티스는 영화에 넣을 에피소드를 촬영했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몇몇 에피소드를 삭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독은 가장 삭제하기 아쉬웠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삭제한 에피소드는 두 명의 에티오피아 여성이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장면입니다.
출처/unsplash.com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생활의 어려움이 아니라 남편과 자식 이야기입니다. 서로 남편을 흉보거나 욕하면서 깔깔대지요. 리처드 커티스 감독은 기근이 닥친 에티오피아를 방문해서 주민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은 생활고를 걱정했지요. 그러나 아내, 남자친구, 자식, 친구 이야기를 하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삶이 벅찬 곳에는 사랑이 싹틀 여유가 없다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지 않나요?”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말입니다. 미리 마음의 문을 닫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은 예기치 않은 첫눈처럼 우리를 찾습니다. 그 뒤에 닥칠 고민은 미래의 당신에게 맡겨둡시다. 지금처럼 열심히, 또 행복하게 살아가세요. 그러다 보면 사랑은 시나브로 당신을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연애상담소: 예술에 길을 묻다 ① ] 흙 수저도 사랑할 자격이 있나요? < 연애상담소: 예술에게 길을 묻다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