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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① 고통에 대하여 - 아실 고르키

[미술로 생의 철학 질문하기]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 1904–1948),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과 함께 20세기 미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미국 화가  

[미술로 생의 철학 질문하기]  시리즈는  당대를 비롯하여 현재까지 미술계에 영향을 끼치며 회자되는 예술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각 편마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통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고통, 행복, 불완전함 등 삶의 본질에 가까운 개념을  예술로 엮어 질문한다.


Arshile Gorky, The Liver Is the Cock's Comb , 1944


“괴로움은 의식의 시작이다.” 


ㅡ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Arshile Gorky,  Self-Portrait at the Age of Nine, 1928


보스다니그 마누그 아도이안 Vosdanig Manoog Adoian


그의 본명은  '보스다니그 마누그 아도이안'이었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후 '아실 고르키'로 이름을 바꾸어 살아가게 되었다.


위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적 화가인 그의 몇 안 되는 인물화로, 자신의 아홉 살 때 모습을 그린 <아홉 살의 자화상>이다.  예술가들의 자화상은 흔히 '내면의 자아'라고 불리며, 그 자체로 자아의 표현이 된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다른 자화상들과 반대로, 작품 속 아홉살의 아도이안은 초점이 불분명한 눈으로 정면이 아닌 곳을 응시하고 있다.  여러 번 덧대어 칠해진 낮은 명도의 물감, 높은 채도의 얼굴 표현,  목을 바짝 두르고 있는 옷, 무미건조한 표정은 그의 삶에 이어진 고통과 좌절을 보여준다. 


Arshile Gorky, Untitled(Self-Portrait), 1929


아실 고르키  Arshile Gorky


그의 삶에는 여러 불운이 함께했다. 인생에 첫 번째 고통은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함께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가족을 반(Van) 이라는 마을에 남겨둔 채 미국으로 이주한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가족들과 러시아로 도망쳤지만 아르마니아 예레반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자매들의 사인은 굶주림이었다. 참혹한 대학살의 상황과 어머니의 죽음은 그가 예술가의 자질을 키워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세가 되던 해, 가까스로 미국에서 아버지와 재회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먼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 이유가 아버지의 도망을 기점으로 시작된 그의 인생의 불운과 고통 탓인지, 흘러가 버린 시간 탓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이후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다는 행위와 동시에 가족과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모호한 본래 정체성을 탈피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가진다. 그는 그 시점에서 이미 주변인들에게 자신을 조지아 출신의 귀족이라고 속이며 자신의 이름을 '아실 고르키'('아실': 러시아어로아킬레우스 Achilles, '고르키': 냉혹한 인간  the bitter one )로 바꾸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자신이 내뱉은 거짓의 세상을 살아간다. 


Arshile Gorky, Diary of a Seducer, 1945


모순과 고통의 이치


안타깝게도 아실의 인생은 그 이후 더욱 처참해진다. 자신이 받는 필연적인 고통의 상수를 거짓으로 치부해버리자 그는 말 그대로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때에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더욱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우수했다. 또한 아실은 자신이 겪은 대학살의 현장과 당시의 배경적 사실을 그림에 녹여내는 것에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독특하고 시그니처 스타일을 사용했으며, 캔버스에 선과 페인트의 복잡한 풍경을 만들기 위해 색상을 오버레이(overlay)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추상 회화에 '생물학적' 형태를 가져오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는 뒤틀렸지만 우아한 선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이면적 표현 기법은 아실 고르키만의 미술이자, 독창적인 하나의 세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실의 세계에서는 두가지 존재의 충돌이 일어난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거짓말을 일삼는 자신과 예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또다른 자신의 존재. 이 존재들은 전부 꾸밈없이 올바른 존재였으나  양면성이 존재했기에, 이 사이에서 아실은  좌절의 과정을 겪었다. 이 '좌절'은 흔한 슬픔이자, 전쟁 트라우마, 혐오 또는 고독함이기도 하다.


그의 생이 끝나기 2년 전,  또 다른 일련의 위기가 그를 덮쳤다. 작업실의 일부가 불에 타 버렸고, 그가 애증으로 그려 나간 '고뇌'의 수작 30점 역시 화재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또한 대장암으로 인해 수술을 받았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는 불륜을 저질렀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지고, 팔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더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된다. 아실에게는 아내도, 아이들도, 그 누구도 곁에 남지 않았다. 


Arshile Gorky, Agony, 1947


안녕,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여


1948년 7월 21일, 자신의 학생 한 명에게 자살 예고를 한 후 아실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가 죽은 현장 주변에 있던 나무 상자에는 '안녕,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위 작품은 <고뇌>라는 작품으로,  그의 전 생애에 걸친 고통을 잘 표현해 냈다고 평가받는다. 


그에게 찾아온 불운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것은 대체로 불가피한 사건이며, 고통과 불운은 그의 생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생애에 있어 존재하는 '부조리'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뒤흔든 일련의 사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추상표현주의 미술계의 거장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실의 생애에 빗대어 묻는다. 불운이란 어느 곳에서 찾아오고, 그를 동반하는 고통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고통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유이자, 인생의 모순, 즉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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