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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화가 열전⑥] '모던' 관찰자 에드가 드가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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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은행가의 아들, 화가가 되다


인상주의자면서도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를 사랑했으며, 변화무쌍한 19세기 모던 파리의 모습을 누구보다 자세히 포착했지만, 결코 야외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예술가, 그의 이름은 에드가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1834-1917)다. 이처럼 한 단어로 규정 짓기 어려운 예술가인 드가는 1834년 7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프랑스 혁명 때 나폴리로 이주하여 나폴리 은행을 설립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나폴리 은행의 파리 지점에 근무하였다. 부유한 은행가 집안 출신이었던 드가는 집안의 기대에 따라 1853년 파리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법대에 다니면서도 예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곤 했다.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화가로서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는 법대를 그만두고 1855년 국립 미술 대학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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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가 모사한 외젠 들라크루아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1860년경. / 출처 : Wikimedia Commons


존경하던 화가 앵그르와의 만남, 그리고 이탈리아로의 여행


어린 시절 드가에게는 폴 발팽송(Paul Valpinçon,1834-1894)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폴의 아버지인 에두아르 발팽송(Edouard Valpinçon,1807-1881)은 미술품 수집가로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앵그르를 동경하던 드가가 앵그르를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발팽송의 소개로 만나게 된 드가에게 앵그르는 “기억을 되살리던, 자연을 보고서 그리던 선을 많이 그려 보게”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이 조언은 드가가 화가로서 발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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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 '목욕하는 여인' , 1808년. /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작품은 본래의 제목과 다르게 소장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발팽송의 욕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56년 드가는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난다. 친척들이 있는 피렌체와 나폴리 그리고 로마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조토(Giotto di Bondon, 1267-1337)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 등의 작품들을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보며 연구하였다. 그는 1860년까지 700여 점의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과 고전주의 시기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작품 속 인물들의 움직임과 곡선 표현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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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폴 발팽송의 초상', 1855년. / 출처 : Wikimedia Commons


따로 또 같이, 그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


한순간의 장면을 포착하여 담아내는 회화의 특성상 일반적으로 회화 속의 인물들은 보통 일시 정지한 듯 멈춰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드가는 특유의 독특한 화면 구성과 인물의 심리묘사를 통해 자신만의 시각을 작품 속에 담아내었다. 특히 그는 인물을 묘사할 때 인물과 인물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이나 공허함 등의 감정을 잘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58년 그가 이탈리아 여행 당시 피렌체에 거주하고 있는 고모의 가족을 모델로 하여 그린 <벨렐리 가족>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 속 네 명의 가족은 한 공간에 함께 모여 있다. 그런데 저마다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긴장감과 어색함이 감돈다.


드가는 벽에 걸린 할아버지의 초상화와 검은 상복을 입은 고모의 모습을 통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표현했다. 뒤에서 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는 고모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고모부는 가족과 떨어져 등을 돌린 채 멍하니 앉아 있다. 그리고 작품의 가운데 엉거주춤한 소녀의 모습이 어딘지 불편하다. 또한 서양 미술사에서 신의와 정절을 의미하는 상징인 강아지가 오른쪽 아랫부분에 반쯤 잘린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처럼 드가는 독특한 구도를 통해 이 가족이 겪고 있는 갈등과 그로 인한 심리적인 어려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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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 '벨렐리가족', 1858년-1860년. / 출처 : 위키피디아


마네를 만난 드가, 현대에 주목하다


1862년 당시 루브르박물관에서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1559- 1660)의 작품을 판화로 모사하던 드가는 마네를 만나게 된다. 마네는 드가의 재능을 높이 샀고 둘은 친밀한 우정을 쌓아나가게 되었다. 특히 과거의 일들을 주제로 그리는 역사화보다 동시대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에 흥미를 느낀 마네는 드가에게도 조언을 하며 그가 현대에 주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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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마네의 초상화', 1868년 경. / 출처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예술적 교감의 장소, 카페


19세기 파리는 당시 오스만 남작의 주도로 도시 재정비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파리는 새로운 도시로 재탄생되었고 이러한 도시의 새로운 모습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카페는 예술가들이 함께 대화를 나누고 교류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드가는 마네의 소개로 당대의 유명한 카페인 게르부아에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30)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만났고 이는 훗날 인상주의가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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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카페 게르부아에서', 1869년. / 출처 : 워싱턴 국립미술관


새로운 여가, 경마


한편, 영국에서부터 유입된 경마는 상류층들을 중심으로 당대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경기 규칙을 제정하는 데 직접 관여할 정도로 경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높아지는 경마의 인기에 따라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고, 예술가들도 경마장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드가 역시 말과 기수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그렸으나, 그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달리는 말의 속도감을 담아내는 대신 주로 출발 직전의 멈춰 있는 말과 기수의 모습을 표현했다. 이는 색채와 구도에 대한 드가의 흥미에서 비롯된다. ‘예술가는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작업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드가는 야외에서 그리기 시작한 작품들을 자신의 작업실에서 완성하곤 했다. 그는 같은 주제의 작품을 여러 번 수정하여 그리면서 자신만의 색채와 구도를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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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경주 시작 전', 1882년-188년. / 출처 : 위키피디아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포착된 발레리나들


드가하면 발레리나 그림이 바로 연상될 정도로 발레리나를 그린 작품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그는 발레리나의 모습을 마치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포착하였다. 이와 같은 시도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 많은 관심을 끌었던 일본 목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특히 일본 목판화에서 나타나는 잘린 형태와 위에서 아래를 내려 보는 것과 같은 파격적인 구도는 드가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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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에투알', 1876년 경. / 출처 : 위키피디아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수석 발레리나를 의미한다. 당시 발레리나들은 노동자 계급으로서 부유한 후원자들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드가는 이러한 사회의 이면을 무대 뒤에서 발레리나를 바라보는 검은 양복의 남성을 통해 나타내었다.


살롱전과의 결별 그리고 제 1회 인상주의 전시의 참여


드가는 살롱전 입상을 바라며 도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번번이 낙선했다. 이에 드가는 1870년 『르 파리 주르날』지를 통해 살롱전 측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한 뒤 살롱전에 마지막으로 출품한 이후 다시는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이후 드가는 훗날 인상주의자들로 불리는 예술가들과 함께 무명의 예술가 협회를 결성하고, 1874년 사진작가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전시회를 연다. 비록 드가는 인상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다른 예술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그는 총 8번 개최되었던 인상주의 전시 중 1882년 열린 제 7회 인상주의 전을 제외한 모든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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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뉴올리언스의 목화거래소', 1873년. / 출처 : 위키피디아 드가는 1872년 여름에 미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외삼촌이 운영하는 뉴올리언스의 목화 거래소의 모습을 그렸다. 이 작품은 1874년 열린 제 1회 인상주의 전에 출품되었던 드가의 10점의 작품 중 하나다.


드가의 작품 속에 표현된 다양한 여인의 모습들



드가는 발레리나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도시의 발전으로 파리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당시 파리에는 빨래를 담당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드가는 여성 노동자들을 통해서 도시 생활의 이면을 보여주었으며, 드가의 작품은 이후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비롯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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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다림질 하는 여자' 1873년. / 출처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회화를 넘어 조각까지


드가의 회화작품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조각 작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언제부터 조각 작업을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후 작업실에서 발견된 150여 점의 조각을 통해 그의 조각 실력이 수준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력의 악화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드가는 보불전쟁 당시 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나 시력 문제로 포병대에 배정되어 근무했을 만큼 시각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각에 대한 드가의 관심은 단순히 시력 저하에 따른 회화의 대체라기보다 인체의 움직임과 공간 구성에 대한 예술적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밀랍과 청동 그리고 점토 등의 다양한 재료를 통해 끊임없는 예술적 시도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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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스페인 무용수', 1884년/ 1920년. / 출처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처럼 드가는 자신의 삶에서 다양한 예술 경향과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다. 그가 지닌 광범위한 예술적 스펙트럼만큼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섬세하게 19세기 모던 파리의 모습을 기록한 예술가임은 틀림없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남긴 모던한 파리의 모습은 그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당시 사회의 모습을 증명하며 드가가 얼마나 예리한 모던의 관찰자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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