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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1)메타복스운동은 미술계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화가의 아뜰리에] 홍승일 작가 

폐건축자재를 오브제로 사용하는 화가
1980년대 메타복스운동은 미술계를 향한 우리들의 몸부림이었다

데일리아트는 화단에서 주목 받고 있는 중견작가의 아뜰리에를 찾아 그의 예술 작품 및 성과, 그동안의 예술 활동 과정에서 감추어진 이야기를 듣는 '화가의 아뜰리에'를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80년대 대안적 미술 활동 그룹인 메타복스의 멤버였고 오랫동안 서울예고에서 후학들을 지도해온 홍승일 작가를 사당동 그의 아뜰리에에서 만났습니다. - 편집자 주


화가의 아뜰리에-[1, 홍승일 작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작가


-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나는 포천 이동에서 태어나서 5학년 때 서울 강서구 화곡동으로 이사했다. 전학을 가니까 당시의 화곡동은 내가 자란 이동처럼 시골과 같은 분위기였다. 공항중학교, 서울예고를 나왔다. 포천  이동막걸리로 유명한 이동에 살 때 이웃집이 보안대(기무사)였다. 거기에서 근무하신 분이 미술대학을 다니신 미술을 좀 아는 분이었다. 그분은 내 그림을 관심 있게 보셨다. 나는 사람을 그릴 때 머리부터 그리지 않고 발부터 그렸다. 그분은 사람을 왜 발부터 그렸느냐고 하며 특이하다고 나에게 관심을 많이 가졌다.


내가 사는 집이 외딴집이어서 종일 그림만 그렸다. 그런데 우연히 포천 이동에서 나의 그림을 관심 있게 본 그분을 화곡동 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학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분의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어린 유아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내 그림을 전적으로 지도하기보다는 한 번씩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그분의 권유로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내 스타일은 전문 입시학원에서 지도받은 것이 아닌 혼자 터득한 스타일인데, 서울예고에서 가능성을 보고 뽑은 것 같다. 75년에 예고에 입학하고 78년에 홍익대에 입학하고 86년 대학원도 마쳤다. 홍익대에서 '메타복스'라는 미술 동인 그룹을 결성해서 활동을 했다. 대학원 마친 후 86년부터 2000년까지  예고 실기 강사를 하였고, 2001년 예원학교에서 2년 근무하고, 그후 40세 부터는 서울예고에서 22년 교편 생활을 했다.

서울예고 졸업식에서, 미술상 수상 후 아버지와 한 컷

- 처음부터 캔버스에 그리는 회화만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치 미술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많은 오브제 중에서 폐건축 자재를 활용하는가?

작가의 방 밖에 쌓아둔 폐 건축 자재. 폐건축 자재는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훌륭한 오브제이다.

나는 일찍부터 만화를 그리고 오려서 세우거나 칠흙으로 동물을 만드는 입체적인 미술을 즐겼다. 데생을 연습 할 때도 목탄으로 그리고 손가락을 이용해서 번지는  회화적 느낌을 좋아했다. 도자기 만드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공간에서의 입체작업에 자연히 눈을 뜬 것 같다.

태양의 집, 1989, Oil on Wood,  980x240x260cm

내가 폐자재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것에서 인생을 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북 용천에서 월남하셨다. 그분들은 참으로 힘든 시절을 보낸 분들이다. 우리 선배들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월남전에 참여하여 전사한 사람들도 많았고 돈을 벌기 위해 열사의 나라 중동 현장에서 힘든 일을 한 세대 아닌가? 그분들은 고통과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세대이다. 그분들을 아버지로, 형으로 두고 그 밑에서 자란 우리들은 골목에서 놀 때 시멘트와 철골로 만들어진 담벼락에서 놀았다.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면서 생긴 일차적인 산업 폐기물에 그들의 모든 인생이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판넬이나 합판도 깨끗한 판넬이나 합판이 아니라 거푸집으로 사용되어 다 낡아 빠진 건축 자재에 인생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폐건축 자재를 통한 작품 활동에 몰입한 것 같다. 그래서 그 모든 삶의 궤적이 폐자재 위에, 그 폐자재를 활용한 내 작품에 녹아 있다.


-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과 다른 본인의 작품 소개, 작품과 관련된 에피소드 등을 부탁한다.

황혼의 강,273cm*121cm mixed media 2024

이것은 강화도 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이 작품이 우리의 인생 같지 않나캔버스가 아니라 판넬 작업을 한 것은 공사장에서 난 상처뚫린 구멍과 거친 것들이 우리 인생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을 해서이다삶을 보여주는 장면과 같아서 이런 작품을 했다.

1996_죽은 갯벌과 황페한 영혼_mixed media_Installation View  1996

1996년 혜화동의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 빌딩)에서 개인전을 하도록 심사가 통과되었다정신 없이 전시 준비하기에 바빴는데 그 와중에 아내를 만나 연애하기도 바빴다그리고 무슨 배짱으로 중국 여행을 보름이나 했다전시가 한 달 남았는데...구상이 안되어 과감하게 보름동안  중국 만주지역을 여행하면서 전시 아이디어를 구상했다당시에 문예진흥원 1층은 무척이나 큰 공간이다나는 공사장에서 폐기하는 판넬(합판)과 같은 건축 폐기물을 대형 트럭 두 대를 불러 왕창 실어와 진흥원 앞에 쏟아 놓았다진흥원직원들이 놀라 내려와서 무슨 쓰레기를 깨끗한 건물 앞에 버린 것인가 하여 모두 내려와서 구경했다그 판넬을 전시장 바닥에 무작위로 깔아 버렸다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깔았다그것을 '바다'와 같은 느낌으로 설정한 것이다전시회의 제목도 거창했다. <죽은 갯벌과 황폐한 영혼>이었다폐 판넬을 펼쳐 놓은 위에 드럼통을 깔고, 뗏목을  만들어 난파선 같은 이미지를 시도했다.바다 위에 떠도는 영혼의 이미지를 예술 작업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나는 무척이나 열심히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 80년대에 우리나라 미술 운동의 획을 그은 '메타복스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안다. 그 운동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한다. 그리고 학창 시절에는 어떤 작업을 했는가?

'메타복스' 창립전 도록

홍대 입학 했을 때는 단색화,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승원, 최명영 선생님이 계셨다. 고학년을 지도하는 교수로는 박서보, 하종현 선생님이 계셨다. 조교들은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을 추구했다. 교수들은 모더니즘 계열이고, 조교들은 그것에서 파생된 하이퍼 리얼리즘인 것이다. 석고 데생으로 시험을 보는 시절이라 묘사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선배들의 극사실주의 미술에 큰 흥미가 없었다.

1979년 홍대 2학년 재학 중인 홍승일작가

그때 나와 뜻이 맞았던 다섯 명이 '메타복스'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과정을 공부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근대화하면서 변형된  미술활동이  시작되고 서양화가 도입된 것이 1910년 이후이다. 일제 강점기는 엄밀히 말해 우리 미술이 아니라면, 6.25 전쟁 이후 본격적인 현대미술이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미술 사조가 무분별하게 한꺼번에 들어왔다. 6.25 전쟁 이후에는 서구의 2차 대전 이후에 몰려온 앵포르멜 운동이 도입되었다. 짧은 시간에 서구 선진국의 미술 사조를 따라 가는 것이 벅찼음에도 따라가기가 바빴다. 빠른 시간에 세계적인 미술 사조가 아무런 당위성이나 근거 없이 고민 없이 들어왔다. '팝아트'가 미국에서 유행하니까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들어오는 식이다. 그러므로 하이퍼 리얼리즘도 어떤 타당성이나 미술사적 근거의 바탕 위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실험된 것이고,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무조건 외국 사조라 해서 들어온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인간의 감정을 배제하는 기계적인 미술 운동이 아닌가. 그리고 모더니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후배들은 포스트모던적인 감성을 가졌다. 우리는 근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의 중간에 낀 탈 모던세대라 할 수 있다.

East, 1987, Oil on Wood, 250x790cm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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