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신(李維新)은 조선 후기의 여항(閭巷) 문인화가이지만 낯선 이름입니다. 자(字)는 사윤(士潤)이고 호는 석당(石塘)인데 가계와 행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의 학자 유재건(劉在健·1793~1880)이 쓴 여항인들을 소개한 전기집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통하여 그가 여항 문인이자 화가였음을 알 수 있고, 1790년대에 화가 이인문(李寅文), 서예가 유한지(兪漢芝), 서화가 신위(申緯) 등과 교유한 기록들로 미루어 대략 그의 활동 시기를 1700년대 후반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중인 출신 선비이자 화가였던 이유신(李惟新)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인근, 옛 포동(浦洞) 지역의 봄날 풍경을 '포동춘지(浦洞春池)'라는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이 그림은 한 폭의 단순한 산수화라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순간의 숨결을 세밀하게 기록한 장면입니다.
포동의 물가에 반가운 얼굴들이 모였습니다. 생명 있는 풀과 꽃이 향기로운 체취를 흩날리면서 오늘 모인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노을 속에 붉게 상기된 복숭아꽃은 굳이 설렘을 감추려는 기색도 없이 손님을 맞이합니다. 그림에는 여덟 명의 선비들이 작은 연못 주변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가운데 푸른 옷을 입고 앉은 인물이 모임을 주선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앞에는 지필묵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 위에는 아직 한 자도 적히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자리를 잡았지만, 모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고요히 꽃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술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대화를 나눕니다. 무리 지어 새싹도 밟고 시회를 하러 나왔다가 춘몽에 혼곤히 젖은 모양새입니다. 선비들 각자가 자연 앞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풀어놓은 장면은,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삶의 여유를 잘 보여줍니다.
연못 주변에는 곧게 뻗은 복사나무가 서 있습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과실을 수확하기 위한 나무가 아니라, 꽃을 감상하기 위해 길러진 나무임을 알려줍니다. 꽃은 이미 절정을 살짝 지난 시점으로, 연분홍과 흰빛이 섞이고, 새순이 가지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한창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꽃잎이 하나둘 지기 시작하는 늦봄의 정취. 이는 어쩌면 선비들의 취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지나치게 화려한 절정보다는, 사그라드는 아름다움 속에서 덧없음을 음미하는 감성. 그런 정서는 고운 봄날, 조용히 자연을 닮으려 했던 조선 선비들의 풍류 정신을 드러냅니다.
연못 안에는 부평초(개구리밥)가 퍼져 있습니다. 그 부평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선비 한 사람의 모습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살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세파에 흔들리는 인간사를 바라보는 선비의 내면을 은유하는 듯합니다. 물과 식물, 인간과 시간. 이 작은 연못가에는 자연과 인생이 겹겹이 겹 쳐져 있습니다. 그림 한쪽에는 ‘포동춘지’라는 제목이 적혀 있으며, ‘천원(泉源)’이라는 인물이 지은 짧은 시 한 수가 그 여운을 더합니다.
水淸浦洞漵 물 맑은 포동의 개울가
花香浦洞霞 꽃향기 가득한 포동의 저녁노을
詩樽芳艸上 시 짓고 술 마시는 풀밭
看水又看花 물을 보고 꽃을 보네
‘포동춘지(浦洞春池)’라는 제목에서 포동은 성균관 서북쪽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으로 치면 서울 종로구 명륜동 언저리인데요. 이웃하던 송동(宋洞)과 함께 포동은 봄날에 꽃구경하기 좋은 놀이터였다고 합니다. 봄에 못이 돋보여 ‘춘지’지만 여름에는 물놀이로 시끌벅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선비들은 그즈음 서대문 쪽 서지(西池)로 가 연꽃을 보며 여름을 지냈다네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림 속의 장소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사한 봄날의 풍경이 매력적입니다. 여기에 ‘권주가(勸酒歌·술을 권하는 노래)’ 한 자락만 흘러주면 더 이상 바람이 없을 듯합니다.
이유신, 포동춘지, 19세기, 종이에 담채, 30×35.5㎝, 개인 소장
조경가의 눈으로 본 '포동춘지’
조경가로서 이 그림을 바라보면, 자연을 다루는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무를 심고 돌보는 일에 있어서 종종 '효율'과 '형태'를 우선합니다. 가지를 다듬고 꽃피는 시기를 인위적으로 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동춘지' 속 복사나무들은 스스로 가지를 뻗고, 제때 꽃을 피우고, 스스로의 리듬으로 꽃을 떨어뜨립니다. 인간은 그저 그 곁에 서서 지켜볼 뿐입니다.
조경이란 자연을 통제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이 자기 자신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임을, 이 그림은 조용히 일깨워줍니다. 인간의 손길은 가능한 한 가벼워야 하고, 그 대신 관찰하는 눈과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포동춘지'가 그려낸 모임의 시간대, 즉 꽃이 절정을 지난 시기를 택한 점은, 조경 설계에서도 중요한 영감을 줍니다. 가장 눈부신 순간만을 위해 정원을 만들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자연의 모든 순간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꽃이 피고 지는 과정, 가지가 늘어지고 다시 움트는 과정까지도 조경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연과 인간이 함께 숨 쉬는 진정한 장소가 완성될 것입니다.
이유신이 그린 '포동춘지'는 2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조경가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연을 '소유'하거나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함께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일임을 말이지요. 화사한 꽃보다, 스러지는 꽃잎을 아끼던 선비들의 눈길처럼. 저 역시 오늘, 작은 연못가에 앉아 부평초를 바라보는 선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떠올려봅니다.
저녁 노을 진 포동의 저물녘에 복사꽃을 바라보다
그날의 정경을 탁월한 붓질로 전해주는 이유신의 재주 때문에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상자의 마음이 봄빛으로 물들 것 같습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수화로 간략한 구도와 담담한 색의 사용이 특징인데요. ‘포동의 봄 연못’을 그린 ‘포동춘지’는 이유신의 물기 젖은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작품입니다.
복사꽃을 한자로 도화(桃花)라고 하죠. 도화 이야기는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전해지는데요. 옛 시에서 복숭아나무는 흔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되기도 하고 색정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도화살이 끼었다고 하면 여자가 한 남자의 아내로 평생을 살지 못하고 뭇 남자를 상대하거나 사별하는 살기(殺氣)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므로 행동을 삼가야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런가 하면 하늘나라에는 신선이 먹는 천도(天桃)가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신선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은 동방삭은 삼천갑자, 곧 18만 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소설 <서유기>에서도 먹기만 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천도복숭아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 손오공은, 어느 날 틈을 보아 9천 년 만에 한 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먹습니다. 그 때문에 손오공은 후에 삼장법사가 구해줄 때까지 무려 5백 년 동안을 바위틈에 갇히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처럼 복숭아꽃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과실의 맛이 좋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던 꽃입니다. 대표적인 양목(陽木)으로 알려져 동쪽으로 난 가지가 귀신을 쫓는다는 속설이 있으며, 꽃과 열매가 선경(仙境)과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의미하는 신선들의 과일로 상징됩니다. 한편, 복숭아꽃 자체가 화려하므로 시세에 아첨하는 무리들로 표상되기도 했습니다.
복사꽃에 대한 노래도 많은데요. 그중 우리가 어릴 적 흔히 불렀던 홍난파 작곡, 이원수 작사의 동요 [고향의 봄]에도 복사꽃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동요가 창작될 시기는 일제 강점기인 1927년이고 일본이 창경궁 마당에 벚꽃을 심을 시기였습니다. 시인인 이원수 작가는 고향 마산을 울긋불긋한 복사꽃, 살구꽃으로 치장해 화려한 대궐 같은 풍경으로 노래한 것 같습니다. 일제에 의해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던 그때 심어진 벚나무는 창경원 밤 벚꽃 놀이의 중심이 되었지만 1984년 창경궁 복원 사업으로 지금의 여의도 윤중로로 이식되었고 지금도 여의도 벚꽃축제의 중심이 되었으니 아이러니컬 합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일제강점 초기에도 복사꽃은 진달래만큼이나 흔한 꽃이었습니다. 복숭아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의 인왕산 아래의 ‘도원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복사골’도 있습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 본 무릉도원과 똑같다며 ‘무계정사’를 지어 놀았던 부암동 계곡에도 복사꽃이 만발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선비들이나 백성들은 복사꽃, 살구꽃 아래에서 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네요.
이유신이 남긴 '포동춘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변치 않는 메시지를 건넵니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을 소유하거나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는 것을요. 화사한 꽃보다 스러지는 꽃잎을 아끼던 선비들의 감성처럼, 저 역시 작은 연못가에 앉아 조용히 부평초를 바라보는 선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봅니다.
[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 ⑨] 봄날 연못가에 피어난 풍류- 복사나무 이야기 < 옛 그림 속 나무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