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일본 소설을 계속 찾아 읽었던 때가 있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강남 교보에 가서 일본 소설을 깔아 놓은 평상부터 훑어봤고, 눈에 들어오는 신간이 있으면 사왔다. 사는 게 말도 못하게 힘들었던 때였고, 소설 읽기는 그런 나를 버티는 방편이었다.
그 때 읽었던 수십 권의 소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권을 꼽으라면 「츠바키 문구점」을 꺼내고 싶다. 일본 문학 특유의 예리한 맛이 담겼고, 무엇보다 사랑의 의미를 곱씹게 했던 작품.
대필가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 그녀에게 많은 의뢰인이 찾아온다. 자신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객들에게 이혼을 알리는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부부가 있었다. 사랑했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결혼해서 함께 살았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고.
“그날, 눈처럼 벚꽃이 날리는 가운데 여러분 앞에서 부부가 된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습니다.
(...) 하지만 새로운 반려자와 다시 한번 인생을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아내의 뜻은 흔들림이 없어서, 앞으로 각자 다른 길을 걷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66쪽)
소노다 씨가 의뢰한 일도 있다. 정말 좋아했던 여자 사쿠라에게 보내는 평범한 안부 인사를 담은 편지의 대필.
“이런 말을 새삼스럽게 하는 것도 부끄럽습니다만,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인생을 함께할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고 마음먹었을 정도니까요. 그렇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소노다 씨는 고개를 숙였다. (84쪽)
읽으면서 가슴이 조금 벅찼던 사연. 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는 것.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심을 담아 안부를 전하고 싶었다.
대필가로 살면서 만나는 여러 사람을 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기를 길러줬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새롭게 다가온다. 늘 자신에게 냉정했기에 할머니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선대"라고 불렀더랬다. 그러나 냉정해 보였던 그녀가 실은 언제나 나를 염려하며 슬픔을 견디던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의 시즈코 씨에게 당신은 많은 편지를 보내셨대요.
그 속에는 내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쓰여 있더군요.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언제나 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민하고, 상처 입고, 슬퍼하고.
당신은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았군요.
당신은 언제나 고민하고, 상처 입고, 슬퍼했어요.
선대라는 가면 아래에는 나와 닮은, 혼자 악전고투하는 한 사람의 연약한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철없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309쪽)
잘 벼린 문장이 독자의 가슴을 정육점의 고기 베듯 베고 지나간다. 주인공이 펜팔을 통해 알게 된 큐피라는 아이도 나온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큐피는 아빠와 함께 산다.
“엄마는 천국에 있어.”
그렇게 말하고 큐피는
“외로울 때는 말이야, 이렇게 꼭 안으면 돼.”
양손을 교차하여 자기 몸을 자신의 팔로 꼭 안았다. 눈도 꼭 감았다. (278-279쪽)
이러저러하다가 큐피의 아빠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아빠가 프로포즈를 하고, 주인공은 받아들인다.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주인공의 마음은 들끓는다. 남자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를 기르며 살기로 결심하는 여자. 깊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인 것이다.
사랑을 찾고 나니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가 생각이 난다. 생전에 언제나 내 걱정을 하며 살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할머니께 그 때 하지 못한 말을 편지로 남긴다
이웃에 사는 바바라 부인이 가르쳐주었어요.
바바라 부인은 여름이 되어도 수국 꽃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겨울을 보냈답니다.
그동안 시든 수국은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 시든 모습이 또 그렇게 청초하고 아름답더군요.
그리고 꽃뿐만 아니라, 잎도 가지도 뿌리도 벌레 먹은 흔적조차도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우리의 관계에도 의미 없는 계절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리카게 씨에게 프로포즈를 받았답니다.
펜팔 친구의 아빠예요.
어쩌면 나도 당신처럼 내가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일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주후쿠사의 정원, 예뻤어요.
칭얼대는 나를 업고 당신은 그 정원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당신 등의 온기를 오랜만에 떠올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마워요.
그때 하지 못한 말을 보냅니다.
꽃이 핀 수국, 시든 수국 모두 아름답다. 시들어 있는 수국에 남아 있는 벌레 먹은 흔적도 아름답다. “우리의 관계에도 의미 없는 계절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상실과 만남과 슬픔과 깨달음이 겹치면서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소설은 삶의 한 마디를 넘어서며 눈물을 훔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모습을 마지막 페이지로 덮으며 끝내는 식이다. 다들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닐까.
번역본임에도 두고두고 낭송해 볼만한 문장이 이어진다. 푸르고 밝은 이야기만이 아니라, 아프고 어두운 세월을 넘어서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힘을 준다. 나 역시 상실과 만남과 슬픔과 깨달음이 겹쳐지는 내 삶에 의연하고 싶다고 다짐해 본다.
[고래의 등처럼 나타나는 고전 ⑦] 꽃이 핀 수국, 시든 수국 -『츠바키 문구점』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