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속 동물 이야기③] 동물계의 현자(賢者), 백택

by 데일리아트

요괴의 나라, 일본문화의 백택


중국에서 탄생한 서수 백택은 군주에게 조언을 해주는 현자(賢者), 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백택은 일본과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된다. 한·중·일 삼국의 백택 이미지 가운데 가장 독특한 사례는 일본이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백택의 모습이 일본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흔히 일본을 ‘요괴의 나라’라고 부른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과 세상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특유의 신앙체계는 자국에서 탄생한 요괴뿐만 아니라 백택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 왕실 기록의 백택


그렇다면 일본은 언제부터 백택을 알고 있었을까?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 편찬된 『연희식(延喜式)』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로, 왕실에서 시행한 규범이 담긴 법률서이다. 여러 시기에 거쳐 재발행된 『연희식』 중 현재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연희식』 17세기본에는 백택과 해치(獬豸), 기린(麒麟) 등 상서로운 동물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백택은 일명 택수(澤獸)로, 말하는 것이 능하며 만물의 모든 일을 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현재의 오키나와(沖繩) 지방에 위치하였던 류큐왕국(琉球王國)의 문서에는 명(明)나라 황제에게 백택 문양 보(補)를 하사받았다는 내용과 함께 이것이 상서로운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현자의 성격을 지닌 백택으로 일본 역시 백택을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우친 성스러운 존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문화 속 백택 이미지


그렇다면 일본의 백택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우선, 에도시대(江戶時代)에 편찬된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와 『괴기조수도권(怪奇鳥獸圖卷)』 등 삽화에 실린 백택은 중국에서 살펴본 사자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백택기 문양 역시 호랑이 머리와 용의 몸통을 지닌 정통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3108_8673_1739.jpg

호랑이·사자·용 도상을 지닌 일본 백택, 에도시대 18-19세기


이처럼, 중국에서 정립된 이미지가 그대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본에는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의 백택이 탄생한다. 17세기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일본 백택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 번째는 소 형상을 지닌 백택이다. 두 개의 뿔과 발굽, 복슬복슬한 털이 표현된 백택은 영락없는 소의 모습이다.


3108_8674_2034.jpg

소 도상을 지닌 일본 백택, 에도시대 19세기, 영국박물관


일본 백택이 어떤 이유로 소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는지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중국 당나라 때 편찬된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広佛華厳経随疏演義鈔)』와 『십길상강경문(十吉祥講経文)』 등 불교 경전에서 “소는 백택을 낳는다.”라는 기록이 확인되어 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3108_8675_2212.jpg

인면우신 도상의 일본 백택, 에도시대 17-18세기


두 번째는 사람 얼굴에 소의 몸을 지닌 인면우신(人面牛身) 도상의 백택이다. 이 사례는 동아시아 백택 도상 가운데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모습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미술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면우신 백택 도상의 연원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사례는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 활동한 문학가 잇시키 나오토모(一色直朝, ?-1597)의 『월암취성기(月庵酔醒記)』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백택은 사람 얼굴에 소의 몸을 지녔다. 세상 사람이 이를 지니면 악몽과 불길한 일을 피할 수 있다.”라는 내용과 함께 중국 송(宋)나라 때 간행된 불서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의 상관성을 언급하고 있다.


3108_8676_2338.jpg

백택정괴도, 에도시대 1785년경, 영국박물관


인면우신의 백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마를 포함한 각 신체 부위에 여러 개의 눈이 달린 괴이한 모습으로, 이는 첫 번째 유형인 소 형상을 지닌 백택에게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일본 백택은 어떤 이유로 사람 얼굴과 여러 개의 눈이 달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물론, 일본 현지에서도 이에 대한 뚜렷한 정답을 내놓지 못한 실정이지만 추측 정도는 가능하다. 인면을 지닌 백택은 사람의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특별한 능력, 그리고 여러 개의 눈을 지닌 다목(多目)의 형상은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는 이유 때문은 아닐까?


3108_8678_3122.jpg

합천 영암사지 계단석 가릉빈가상, 통일신라 경산 환성사 수미단 가릉빈가상, 조선 17세기


말하는 동물의 관념은 자연스레 사람의 형상과 혼합되는 현상을 보인다. 불국토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릉빈가(迦陵頻迦)’와 ‘공명조(共命鳥)’는 사람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서수이며, 그리스신화의 ‘스핑크스(Sphinx)’ 역시 사람 얼굴에 사자 몸을 지닌 모습이다. 이처럼, 사람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물이 사람 얼굴을 지닌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3108_8679_4044.jpg

방상씨 탈,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천수천안관음보살도, 가마쿠라시대 14세기, 나라국립박물관


두 번째로 수많은 눈이 달린 다목은 삼라만상을 꿰뚫어 본다는 백택의 특수성으로 추정된다. 물론,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 게 시각을 사용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를 형상화할 때 신체 곳곳에 눈을 배치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표현법이 있을까? 이를 보여주듯이 동양문화에는 방상씨(方相氏)부터 불교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까지 벽사 수호와 구원을 상징하는 여러 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삼라만상에 통달하고 벽사를 상징하는 백택 또한 이와 같은 관념이 적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사람을 보호하는 벽사의 신수


벽사의 관념이 짙은 일본문화 속 백택은 인면우신이라는 독특한 도상으로 다시금 재탄생하였고, 불교미술부터 민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표현된다. 도쿄 고하쿠라칸지(五百羅漢寺) 에는 강렬한 눈매를 지닌 백택상이 법당 입구를 지키고 있고, 19세기 중건된 신사(神社)에도 백택 형상으로 표현된 귀공포가 확인된다. 백택이 성역(聖域)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이다.


3108_8680_4527.jpg

고하쿠라칸지 백택상, 에도시대 18세기경 후쿠시마 가스가신사 공포의 백택, 에도시대 18세기경


백택은 개인 신변까지 보호하는 존재가 된다. 벽사를 상징하는 맥(貘)과 함께 표현된 병풍부터 여행객들을 위한 가이드북인 『여행용심집(旅行用心集)』에 실린 부적은 백택이라는 성스러운 동물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당시 일본인들의 관념이 짙게 묻어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108_8681_4659.jpg

『여행용심집』백택 부적, 에도시대 1810년 백택도, 에도시대 1858년, 도쿄에도박물관


이처럼, 일본문화의 백택은 ‘요괴의 나라’라는 별명에 걸맞게 어떤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지식에 통달하고, 사람들의 신변을 보호해 준다는 믿음과 소망이 내포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술 속 동물 이야기③] 동물계의 현자(賢者), 백택(白澤) 2 < 김용덕의 미술 속 동물 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길 위의 미술관 - 김환기 ①] 모더니즘을 탐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