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든다
그대의 생각이 그대 내면에 또 다른 생명체를 탄생시켰구나. 그는 열렬한 생각으로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로 만들어버렸고, 독수리는 그 심장을 영원히 쪼아 먹는다. 그가 탄생시킨 생명체는 바로 그 독수리였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은 스스로의 집착을 ‘운명’이라 믿고, 하얀 고래에 대한 복수를 향해 전진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집념은 자신과 선원 모두를 파멸로 이끕니다. 어쩌면 ‘운명’이란 신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자라나는 생각과 믿음이 만들어낸 올가미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야기할 『오이디푸스 왕』 역시 ‘운명’을 중심에 둔 고전 비극입니다. 신의 예언을 거부하고 도망치려 했던 한 인간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예언을 실현해 버리는 비극적인 여정.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묻게 됩니다.
운명이란, 하늘이 정한 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까요?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젊은 시절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그것을 피하려 떠납니다. 하지만 그가 피해 도망쳤던 길 위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테바이의 왕이 되어 살아가던 그 앞에, 다시 재앙이 닥쳐옵니다.
그는 재앙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과거를 추적하다가,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합니다. 바로 자신이 이전 왕을 죽인 자이며, 지금의 왕비는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됩니다. 진실을 보지 못했던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까요, 아니면 이제 더는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는 절망이었을까요.
그 후 오이디푸스는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테바이를 떠납니다. 길고도 고요한 유랑 끝에, 그는 아테네 근교 콜로노스에서 마지막 운명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저항과 회피로 시작된 그의 삶은, 끝내 수용과 평온으로 닫히게 됩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한 해의 운세를 점칩니다. 자녀가 좋은 사주를 가지도록 출산 일정을 조율하기도 하고, 결혼 전에 궁합을 맞춰보거나, 중요한 시험이나 계약일을 ‘좋은 날’에 맞추려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고, 통제 가능한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심리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우리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지금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밝은 운명을 예고받은 사람은 현재에 안주하게 되고, 불행한 예언을 들은 사람은 스스로를 포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강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게 되는 순간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듭니다.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이자 가능성일지도 모릅니다.
운명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스스로의 집착에 사로잡혀 독수리를 키워낸 에이해브처럼, 인간은 때로 자신의 생각에 갇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어쩌면 운명이란,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환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운명을 규정짓는 또 다른 힘이 존재합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시선과 편견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통해, 사회가 만들어내는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개인이 아닌 타인의 시선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고, 때로는 단죄하는지를 살펴보며, 운명이라는 개념을 한 걸음 더 확장해 보겠습니다.
by 사색하는 덕주부
책을 읽고, 삶을 사유하며,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기록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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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AI 생성 도구를 통해 직접 제작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