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기록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by 사색하는 덕주부

반만년이 넘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수한 외세의 침략을 겪어왔습니다. 북쪽으로는 중국과 오랑캐의 침입을, 남쪽으로는 일본의 약탈을 반복적으로 감내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이 중국과 일본을 경계하는 데에는,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집단적 기억과 역사적 아픔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한반도를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꽃 피우고 있는 저변에는, 그 땅을 지키기 위해 몸 바친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깔려 있습니다. 조선의 문신이었던 류성룡 선생 역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온몸으로 겪은 뒤, 다시는 후손들이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징비록』을 집필하셨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 『징비록』




조선의 무지와 양반들의 이기심


100년 넘게 이어진 평화는 조선을 나태하고 안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했지만, 조선은 일본이라는 적을 알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조선을 넘어 명나라로 진출하려는 야망 아래, 치밀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전쟁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상륙한 일본군 앞에서 조선군은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치기 일쑤였고,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습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청주에 이르러서야 벌어졌지만, 그마저도 적을 잘못 판단한 결과 대패로 이어졌습니다.

무너진 조선의 성문 앞, 외면하는 양반들

거듭된 패전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당시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이기적인 태도였습니다. 긴급 징집 명령에도 대부분의 유생들은 종이와 붓을 들고 면제 사유를 조목조목 주장했고, 일본군을 피해 임금이 몽진하는 와중에도 동인과 서인은 상대 세력의 과오를 따지며 정쟁에 몰두했습니다. 심지어 전쟁 직후 양주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신각 장군은, 앞서 도망쳤던 상관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으로 인해 억울한 처벌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한 희망의 빛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지킨 것은 결국 백성과 장수의 힘이었습니다. 바다를 통한 보급로를 확보하려 했던 일본의 계획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좌절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봉기해 후방을 공격하니, 일본군은 결국 평양에서 진격이 멈춰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깃든 의병의 불빛


하지만 조정은 이들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명나라 군의 도움을 더 크게 평가했고, 전후 공신 책봉에서는 피난길을 호위했던 신하들이 다수 포함되었지만, 의병장들은 단 한 명도 책봉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지켜낸 백성들의 활약을 부각하는 것이, 백성을 버리고 달아난 위정자들에게는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록은 무엇을 남기는가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수상 연설에서 글이 막혀 더는 써 내려가지 못하던 순간,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질문을 떠올렸다고 말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먹물 속에 잠긴 질문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마음 역시 이 질문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당대의 권세가로서 그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을 솔직히 고백하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후손에게 기록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비록 후손들에게는 아픈 역사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다시는 같은 길을 걷지 말라’는 간절한 당부였을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 - 또 다른 기억의 기록


『징비록』이 전란의 기록이었다면, 진실을 지우지 않기 위해 쓰인 또 다른 기록도 존재합니다. 바로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입니다. 전자는 임진왜란의 참화를, 후자는 광주의 학살을 증언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두 기록 모두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고통을 기억하기 위한 글이었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되돌아보려 합니다.




by 사색하는 덕주부

책을 읽고, 삶을 사유하며,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기록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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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AI 생성 도구를 통해 직접 제작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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