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왜 불편한 정치가 되었나

정치는 기후를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by 전재윤
※ 이 글은 브런치 시리즈 〈기후는 정치다〉 중 2편입니다.
환경은 정책의 사각에서 외면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지만, 불편하기 때문에 회피되고 있을 뿐입니다.


기후위기 담론은 이제 낯설지 않다.

언론은 매년 ‘최악의 폭염’, ‘기상이변’, ‘이상기후’를 보도하고,

정당은 총선이나 대선마다 ‘탄소중립’, ‘그린뉴딜’ 같은 단어를 꺼낸다.


표면적으로는 기후가 ‘정치의제’가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기후위기는 정치 안에 있지만, 정치적 토론의 핵심에는 없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이슈는 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가

기후위기의 정치적 함정은 이거다.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실천하는 사람도 없다.


정당은 기후를 ‘선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로 다룬다.

왜냐하면 기후위기는 너무 복잡하고,

이념적으로도 뚜렷한 ‘적과 아군’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득세나 노동 문제처럼 쉽게 편 가를 수 있는 이슈는

정치적 메시지로 활용되기 쉽다.

하지만 기후 문제는 그렇지 않다.


모두가 “중요하다”고는 말하지만,

누가 얼마나 감당할지를 말하는 순간, 표는 줄어든다.


기후는 정치의 ‘무풍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피해지대’다.

기후위기가 정치에서 침묵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피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정치적 결정의 수많은 갈등 뒤에는

‘불편해서 미뤄진 환경정책’이 있었다.


예를 들어, 탄소세 도입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같은 벽에 부딪힌다.

‘경제성장과 충돌한다’, ‘서민 부담을 키운다’, ‘산업계가 반발한다’.

그래서 정치권은 문제를 “제기만” 하고, 실제 도입은 미룬다.


결국 기후위기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라

침묵과 회피로 ‘시간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대응되고 있다.


환경정치는 ‘선명한 정치’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환경이 정치의제 안에서

좀 더 선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를 정치화하지 않으면,

그 문제는 ‘영원히 남의 문제’로 남는다.


환경정책은 가끔 너무 착하다.

좋은 말만 하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그 방식으론 정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산을 요구하고, 기득권과 충돌하며, 타협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태도

이제 환경에도 필요하다.


우리는 더 이상 ‘모두가 찬성하는 정책’을 기다릴 수 없다.

대신, ‘누군가는 불편해하더라도 나아가는 제도’가 필요하다.


기후위기는 우리 사회의 정치 감각과 용기의 수준을 묻고 있는 문제다.

그리고 지금, 정치가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 답을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