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선택의 순간이 평생을 좌우한다

by 꿈의복지사

훈련소의 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과의 첫 동침.
적막한 어둠 속에서도 7월의 공기는 묘하게 얼어 있었다.
쉬이 잠들 수 없는 긴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이튿날 새벽, TV에서만 듣던 ‘기상나팔’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빠아~빠 빠빠빠, 빠빠빠, 빠빠빠.”
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동기들이 허둥대자 조교의 날 선 호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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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기상합니다! 침상 끝단에 정렬! 좌우로 정렬! 복명복창합니다!”
“현 시간부로 잠자리 정리 방법을 알려줍니다. 단 한 번만입니다.
내일 아침 어리버리한 훈련병 있으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1997년 8월 1일,
나의 첫 번째 군 생활의 아침이 시작됐다.
(눈을 뜨자마자 8월 1일 이등병 2호봉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병장을 7개월 하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한여름의 중심으로 달려가는 8월의 첫날,
기온은 이미 30도를 훌쩍 넘겼다.
TV 드라마의 멘트처럼 **‘긴 하루의 서막’**이 열렸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CS복’**이라 불리는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위에 6·25 전쟁에서나 봤을 법한 철모를 눌러썼다.


겉은 쇳덩이, 안은 플라스틱. 무게가 제법 나갔다.
세탁 한 번 되지 않은 훈련복엔 쉰내가 배어 있었고,
흙먼지가 그대로 남은 옷은 몸에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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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기수들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던 그 옷을 입고,
처음 느껴보는 무게를 고스란히 견디며 우리는 제식훈련장으로 향했다.

“좌향좌! 우향우! 좌향앞으로가! 줄줄이 우로가!”
조교의 구령이 폭염을 뚫고 메아리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 타는 듯한 햇볕,
그리고 끝날 기미 없는 “앞으로 가!”

그래도 그 와중에 작은 행복은 있었다.
고된 훈련 뒤 맞이한 점심 식사,
소박한 반찬에 꽁보리밥을 허겁지겁 삼켰다.
(4인 1조로, 모든 사람이 다 먹어야 일어날 수 있었다.)
점심 후 후식으로 나오는 연유 아이스크림 하나,
그리고 폭염으로 조정된 훈련 시간 덕분에 허락된 낮잠 한 시간.
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소소한 호사였다.


입소와 함께 사회와의 모든 연결은 끊겼다.
2주 동안은 TV도, 신문도 볼 수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지만,
궁금해도 지금의 삶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은 멀리서 돌아가고,
우리는 오직 구호와 구령에 따라 움직였다.

하루의 끝, 전투화를 닦는 시간만큼은 달랐다.
DJ.DOC의 〈DOC와 함께 춤을〉, H.O.T의 〈늑대와 양〉,
구본승의 〈시련〉, UP의 〈뿌요뿌요〉.
그 노래들이 ‘우리의 청춘’을 되찾게 해주는 위로의 순간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어느덧 퇴소를 앞둔 시점.
각 부대에서 신병 모집이 시작됐다.
특공대, 여단, 헌병대 등에서
체격 검사와 면담을 거쳐 신병을 차출해 갔다.

나는 어떤 빽이 있었던 것도, 대단한 용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군 생활을 하고 싶었다.
특공대 후보 명단에 있었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지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상명하복의 조직에서 그렇게 말한다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래도 그건,
세상을 향한 나름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퇴소일.
고향에서 부모님, 이모, 이모부가 면회를 왔다.


자가용도 없이 대중교통으로 어렵게 찾아온 가족들.
나는 그 앞에 큰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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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본 엄마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뒤돌아선 어깨로 막내아들을 향한 마음을 대신했다.

짧은 식사 후, 가족과의 작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또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
같은 내무반에서 웃고 울던 동기들과 마지막 악수를 나눴다.
누구는 강원도로, 누구는 전라도로,
누구는 해안 경계 근무지로 떠났다.
우리는 서로의 눈빛으로 작별을 대신했다.

그렇게 연병장에 수송 트럭이 줄지어 섰고,
나는 버스를 타고 기차 수송 열차로 향했다.

이름 모를 역,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열차 안.
우리는 각자의 군복 위에
‘선택의 순간’이 결정한 이름표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 선택이 평생의 방향을 바꾸리라는 걸,
그땐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흔들리는 기차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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