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식혜

기억을 데우는 시간

by 꿈의복지사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할머니가 한 분 있습니다.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근무하던 시절, 저는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불편한 점을 살피고 정서적인 지지를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순연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직지사를 끼고 있는 산자락, 굽이굽이 좁은 시골길 끝 돌담으로 둘러싸인 옛 한옥에 홀로 살고 계셨습니다.

키는 작지만, 항상 곱게 빗은 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단아한 모습.

마치 오래된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분이셨습니다.

방문 전에는 늘 안부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언제 오는데?”, “밥은 먹었냐?”, “운전 조심해서 와라.”하며

제 안부를 챙겨주셨습니다.
그 모습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고향에 계신 제 친할머니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혈연은 아니었지만, 마음으로 저를 손자처럼 품어주셨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눈이 소복이 쌓이던 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접을 내오셨습니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추워서 데웠다, 식혜다.”
보통 식혜는 시원하게 마시는 음료지만, 그날 할머니는 식혜를 따뜻하게 데워주셨습니다.
추위를 녹이라는 마음, 그 따뜻한 배려에 저는 깊은 울림을 느꼈습니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늘 무엇이라도 내어주시려 했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께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했습니다.
도움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지만, 늘 제가 더 많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감사하면서도 죄송했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은 깊어졌습니다.
방문 때마다 냉수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회복지사와 대상자가 아니라, 손자와 할머니처럼 웃고 떠드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엔 지하수로 머리를 감고 등목을 하던 그때의 시원함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천식과 심장질환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여름, 밭일을 하다 햇볕에 쓰러지셨다 했습니다.
그 후 저는 자주 찾아뵙고 안부를 챙기며 마음의 안정을 드리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전화가 닿지 않았습니다.
급히 찾아간 집은 비어 있었고, 이웃을 통해 들은 소식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아드님 댁으로 옮겨지셨다가, 그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하셨는데, 그 이별은 준비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기억은 제 안에 아련히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 설날,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따뜻한 식혜를 내어주셨습니다.
방금 만든 식혜라 온기가 남아 있었죠.
그 순간, 문득 그날의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추운 겨울, 사랑을 데워 내어주시던 그 한 사발의 식혜.
그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닿는 따뜻한 구속이었습니다.

할머니, 하늘나라에서 잘 계시죠.
그 시절의 정과 온기, 그리고 따뜻한 식혜의 기억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마음으로 내어주는 따뜻한 식혜 한 잔이 되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오늘도 저는 어르신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날의 따뜻한 식혜 한 잔을 다시 마음에 품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억’을 지키는 방식이자,
세상을 따뜻하게 묶어주는 아름다운 구속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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