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응시

윤동주의 시

by Mignon

윤동주의 시는 분열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인 자기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상이 분열된 자아를 끝내 통합하지 못한 채 자기 내부의 낯선 타자와 대결하는 상태에 머문 것과 비교된다. 윤동주 역시 근대적 자아의 불안과 내적 균열을 예민하게 감지했지만, 그가 선택한 대응 방식은 파괴적 대결이 아니라 성찰과 수용이었다. 그의 시에는 그림자의 출현과 자각, 시 쓰기를 통한 통합이 완결된 형태로 드러난다.


윤동주(1917-1945)


시 「거리에서」는 밤거리에서 '그림자'를 발견한 체험을 그린 작품이다. 윤동주 시 중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시를 문학치료적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이 시는 그림자의 출현과 인식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림자는 달과 전등 아래에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달빛만 있다면 조용히, 존재감도 없이 나를 따라다닐 그림자가 전등과 만나면서 하나 더 생성된다. 전등의 그림자는 달빛의 그림자보다 더 어둡고 선명하다. 그런데 이 시는 광풍, 그러니까 미친듯이 바람이 부는 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거센 바람에 전등이 흔들리면서 내 그림자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한 개였던 그림자가 두개, 세개로 보이기도 한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아 분열의 상태도 달라짐에 유의하여 읽어보자.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몸에 둘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갈피 두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윤동주, 「거리에서」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어두운 달밤의 거리를 걷는다. 달밤이라는 배경은 의식의 통제가 느슨해지고 무의식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쉬운 심리적 조건을 형성한다. 어둡고 춥고 불안한 환경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며, 억압된 정서가 상상적 이미지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시인의 상상 속에서 도시는 바닷속 풍경으로 변형된다. 전등은 진주가 되고, 화자는 그 아래를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가 된다. 인어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존재로서 의식과 무의식이 미분화된 화자의 상태를 상징하는데, 그 조그만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의 무력감과 외로움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정서적 토대 위에서 억압된 무의식은 ‘한몸에 둘셋으로 흔들리는 그림자’로 분열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그림자는 자아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제한 무의식의 일부다. 이 그림자의 출현은 자기 내부의 낯선 감정과 욕망을 처음으로 인식하는 단계에 해당한다. 중요한 점은 윤동주가 이 그림자를 파괴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그것이 흔들리고 피어나는 과정을 조용히 응시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기 내부의 어두운 부분을 관찰 가능한 대상으로 두는 자기 객관화의 시작이다.


그림자가 ‘푸른 공상’으로 전환되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수직적 운동을 보이는 마지막 부분은 무의식이 점차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장면으로, 상상력의 근원이 그림자에 있음을 암시한다. 미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 생성된 그림자는 소용돌이 치는 외로움의 정서 지나 상상력의 세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상상력이란 대부분의 작가에게 그렇듯 괴로운 환경과 외로운 마음이 만든 결과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에서 자아와의 첫 만남은 어두운 그림자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이 그림자는 이후에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흰 그림자」),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또다른 고향」) 등의 이미지로 인격화된다. 윤동주 시에서 자아와 그림자와의 만남은 파괴적 대결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낯선 부분을 인식하고 응시하는 단계를 가진다. 분열의 자각과 응시가 곧 치유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분열된 자아의 화해


윤동주 시에서 진정한 자기 동일성을 이루는 거울은 ‘시 쓰기’ 자체다. 「쉽게 씌어진 시」는 분열된 자아가 시 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전문

「쉽게 씌어진 시」는 1942년 윤동주가 일본 릿쿄 대학으로 유학한 직후에 쓰였다. 이 시의 화자는 육첩방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있다. 외부 세계는 밤비로 상징되는 차갑고 불안한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만, 홀로 침전’한다고 말한다.


침전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움직임이다. 표면의 소란을 지나 내면의 깊이를 지향한다. 감정 회피가 아니라 감정 속으로 들어가 머무르는 자기 수용의 태도이다. 윤동주는 현실의 불안과 자기 내부의 슬픔을 밀어내지 않고, 그것과 함께 머무는 선택을 한다. 이때 ‘한 줄 시’가 써진다. 시 쓰기는 단순한 창작 행위를 넘어, 내면의 혼란을 언어로 조직화하는 자기 통합의 행위임을 보여준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한다. 분열된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고 손을 맞잡는 장면이다. 그림자와의 화해, 다시 말해 내부의 부정적 정서를 배제하지 않고 인격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이상의 분열된 자아는 화해하지 못했지만, 윤동주는 시 쓰기를 통해 분열된 자아를 통합했다.


이미지의 흐름 또한 주목할 만하다. 밤비라는 어둠과 물의 이미지가 침전을 유도했다면, 시가 써지는 순간 등불이라는 불과 빛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저 어둠을 조금 내몰 뿐인 이 작은 등불은 이후 찬란한 아침의 이미지와 연계된다. 물에서 불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혼돈에서 통합으로 이동하는 상징적 변화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침이 가까워진다는 인식은 치유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회복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윤동주에게 시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는 거울이자, 분열된 자아가 화해하는 악수의 공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속에 침전하며 어둠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회복했다.


문학치료적 관점에서 윤동주 시는 분열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림자의 자각, 자기 성찰, 그리고 시 쓰기를 통한 자기 수용과 통합에 이르는 완결된 치유의 경로를 제시한다. 그래서 윤동주 시 읽기는 오늘날 독자에게도 내면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성찰하며 결국 자기 자신과 악수하도록 돕는 치료적 읽기의 모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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