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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연구소 잠시 Apr 23. 2023

저자와 작가, 그 사이 어디쯤

거기에 서서, 작가됨의 이상과 실제 작가됨의 간극에 대해


우리는 ‘작가’라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을까? 대학생 때부터였을까, 조금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될 것 같다. 학창시절, 어려서 독서감상문을 썼을 때부터도... 그리고 그 이후로 과제, SNS, 어떤 수단으로든 글을 썼을 때 사람들이 내 글을 좋아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나라는 사람이야말로 칭찬을 받으면 무거운 고래도 번쩍 들어올려 춤을 추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들이 당연히 좋았다. 그런데 글에 대한 칭찬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중에 책을 내 봐’, ‘작가해도 되겠다’, ‘책 내면 내가 사볼게!’ 그것 또한 나를 아주 고양시키며 새로운 꿈을 꿔 보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들로부터 다른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전엔, 쓰는 행위로만은, 끄적인 글들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라는 것. 내가 아무리 글을 써 대고 그 글이 읽히고 공감을 일으킨다 해도, 작가가 되기 전엔 글도 나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지금의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을 갖기까지 대학 졸업 후 6년 간의 방황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 방황의 시간이 있었기에 이 직업에 대한 확신이 더더욱 커질 수 있었지만 지인들은 이 직업도 곧 그만두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직업을 만난다는 것은 운명의 남자를 만나는 것 같은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쁜 남자를 몇 번 거쳐 보면서 진국을 알아보게 되고, 내게 정말 맞는 사람을 알아보게 되는.      


그 6년 동안, 홍보대행사, 영어학원, 카페에서 일을 해 보았는데 그 중 딱 6개월, 글을 써 보겠다고 방에 틀어박힌 적이 있다. 막연히 ‘언젠가는’, ‘정말 쓰고 싶은 게 생기면’ 정도로 미뤄 두었던 ‘작가’라는 꿈이, 삶이란 배의 키를 어디로 틀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슬그머니 부표처럼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가 되려면 소설이나 수필, 시를 써서 ‘등단’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아마 그때는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시도는 내가 글을 쓰는 일로 밥을 먹고 살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쓰는 글들에 대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 언젠가는 작가라는 이름을 가져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것이 꼭 소설가처럼, 적어도 내게 작가의 가장 높은 경지로 그려지는 이름은 아닐지라도 수필가라거나, 저자라거나 하는 정도의 이름은 가져보고 싶었다.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고 경력을 유지하는 일,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서 내게 조금 더 시간이 확보된 나중으로 그 꿈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나는 가끔 ‘작가님’하는 호칭을 듣는 사람이 되어 있다. 등단을 하지 않아도 책을 내는 방법이 많아진 시대니까.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책이 될만한 이야기 그 두 가지가 맞아 떨어졌으니까.     


가장 먼저 그 말을 들은 것은 투고 메일에 대한 답장에서였다. 투고만 해도 ‘일단은’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를 처음으로 작가라 불러준 그 출판사를 통해 첫 책을 내게 되었고 주변 지인들은 재미삼아 ‘작가님’ 혹은 ‘양작가’라 부르고 독자분들로부터, 그리고 강의를 의뢰받아 연락을 주고받을 때 주고 ‘작가’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다.    

  

작가란 타이틀은 지금 생각해봐도 매력적이다. 작가, 작가, 말 자체가 우아하기 이를 데 없다. 이지적인 눈매에 신중한 입매, 고상한 옷차림에 몸짓을 지닐 것 같다. 마치 세상을 보는 제3의 눈이 있고, 세상을 말하는 제2의 입이 있고, 언어를 다루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 같다. 치열한 고민이 있고, 차분한 결론이 있을 것 같다. 우아한 여유가 있고, 초연한 통찰이 있을 것 같다. 입만 열면 명언이, 키보드만 두드리면 명작이 나올 것 같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아본 뒤에도 다른 작가들은 여전히 그렇게 보이는데 독자이기만 했을 때의 내 눈엔 오죽했을까?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낯간지럽다. 첫 번째 이유는 작가라는 말이 주는 어감과 내 실제의 괴리 때문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에 치열한 고민, 차분한 결론, 이지적임과 우아함, 초연함과는 거리가 멀디먼 삶을 살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사실 더 이상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웃 블로그에 어떤 작가가 하신 말씀이 소개되어 본 적이 있다. ‘쓴 사람은 저자, 쓰는 사람은 작가’라고.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내가 ‘저자’는 되었을지언정 더 이상 ‘작가’라고 하긴 어렵겠구나 생각했다. 한 번 생산된 콘텐츠를 재가공하느라 바쁘다. 일기장은 늘 들고 다니며 끄적이지만 단편적인 감정들이다.    

  

나는 다시 작가가 되려 한다. 다시 씀으로서, 작가라 불리기 민망했던 그 두 번째 이유를 지워내 가보려 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이 막연하게 그리던 작가의 탄생과 얼마나 달랐는지에 대해, 즉 그 첫 번째 이유에 대해 씀으로서. 저자와 작가 그 사이 어디쯤, 그 간극에 서서, 내가 생각했던 작가됨과 실제 작가됨의 간극에 대해 써 보려 한다. 내 첫 책이, 엄마가 된 이후의 삶이 우리가 갖고 있던 ‘엄마’라는 이미지와 얼마나 달랐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는 게 묘하게 닮았다. 애초에 모든 것에 이상이 높은 사람이라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되는 것도, 작가가 되는 것도 늘 핑크빛 기대로 바라보고 뒤통수를 맞는.      


그러나 결국, 이렇게 어떤 것에 대한 괴리를 느끼는 것이 또 쓸 거리를 제공해준다. 간극을 메꾸고 촘촘히 연결하는 사람, 그것이 작가의 또 다른 정의가 아닐까? 이상과 현실의 간극, 시선과 실제의 간극, 말과 관념의 간극... 그것을 글로 짜내어 볼 수 있게 띄우는 사람. 그렇게 다시 저자에서 작가가 되어보려 한다. 그렇게 간극들을 기꺼이 맞이하게 되는 것, 그게 작가이자 저자가 되어 본 사람으로서 조금 달라진 점 하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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