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정체성
2026-03-11
5.17km
38:07
07'12"
292kcal
요즘은 어디가나 지문을 찍는다. 핸드폰을 사용할 때도, 헬스장 출입문을 열 때도. 웬 종일 무언가를 까고 포장하고 나르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밥하고 청소하고 손에 물 마를 사이가 없고 핸드크림이 발라져 보송보송 한 상태를 유지할 새가 없는데 그 지문은 늘 골칫거리다. 어느 순간부터 맨질맨질한 손가락엔 지문이 흐릿해졌다. 오늘도 헬스장 앞에서 입으로 김을 불어넣어 지문을 소생시키느라고 여간 애쓴 것이 아니다.
“엄마!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 어떤 아이였어?”
큰 녀석이 엊저녁 식사시간에 물었다.
“엄마는 중학교 때 아주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어. 말도 잘 못하고, 어떤 남학생이 엄마 좋다고 하면 너무 부끄러워서 학교 가기도 싫었어. 창피해서 발표 이런 건 꿈도 못 꿨어. 지금하고는 정말 다르지? 지금같은 성격이었으면 인기가 엄청 많았을텐데....”
그렇게 아이들이 내 시절을 물어 볼 때나 가끔 수십년 전 교복입은 나를 떠올리게 된다. 짧은 단발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교복으로 온갖 멋을 부리는 요즘과는 달리 치맛단이 조금이라도 올라갔을까 명찰은 비뚤어지지 않았을까 머리는 길어보이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학생주임선생님이 몽둥이를 지키고 서있는 교문을 통과했다. 어긋남과는 어울리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빗지 않은 머리로도 사람이 차고 넘치는 마트에도 당당히 가고, 아이들이 작아서 벗어버린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도 운동을 잘 나가고, 옷차림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시선도 전혀 겁이 나질 않는다.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아이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하며, 목소리도 대장부처럼 쩌렁쩌렁하다. 엄마가 되고보니라고 말하면 전국 전 시대 엄마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일반화 시키는 크나 큰 죄를 범하는 것 같지만 여하튼 난 엄마가 되고나서 예전의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렸다. 아니, 지워진걸까.
정체성. 없어져버린 지문만큼이나 사라져버린 나란 사람의 정체성도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간의 시간을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하고 싶지는 않다. 새침하니 얌전하고 수줍음 많았던 학생도 나고, 아무렇게나 휘둘러버린 옷차림에 생판 모르는 남과도 얘기하는 당당한 아줌마도 나니까 세월이 지나 또 다른 누군가가 되어도 자신감 잃지 않는 나라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