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있는 대상이 제대로 쓰이거나 다루어지지 못하여 안타깝다
어제 나는 조그마한 막둥이에게 사랑의 무게를 잔뜩 짊어지게 했다.
11살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눈빛은 그 무게가 버겁고 미치도록 싫다고 엄마가 밉다고 서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어차피 엄마 마음대로 할 거잖아.”
막둥이가 여섯 살 때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생활 잘 하는 무던한 사람이 되질 못한다. 보통 아이들이 성장할 때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앞에서 하원하교 시간을 기다리며 어느 누구의 엄마들하고 의미없는 수다를 떨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어쩌구 저쩌구 시댁이 어쩌구 저쩌구 명절때가 되면 더 말이 많아져 정말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도 머쓱함의 마주함을 참지 못해 아무말들이 대잔치를 벌이는 시간이다. 시간의 적막함으로 인한 부담감과 쓸데없는 대화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문으로 나오는 담임선생님을 보자마자 다행이다 싶은 쓸어내림으로 급히 마침표를 찍고 모두 줄행랑을 친다. 난 MBTI 외향적인 E 타입이지만 그 외향성이 다분히 노력형의 결과이고 내면의 뱉음을 상당히 자제하며 상대를 경계해야 하는 그다지 너그럽거나 융통성있는 성격이 못되는 인간이라 다분히 일상적인 대화임에도 긴장한 탓에 피로를 쉬이 느꼈다. 첫째 아이 때의 그런 괴로운 무료함의 답습을 하지 않겠노라며 둘째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시켰다. 두서 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 맥락은 다음과 같다.
교문 앞에서 매일 봐야 하는 둘째 딸 친구의 엄마가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컸고 성격도 극성스러웠으며 말은 거칠어 자기 자식한테도 '야'라고 버럭 소리지르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우악스러운 엄마를 둔 딸이 우리 딸을 무척 좋아했다. 말해 무엇하랴. 그 아이도 엄마를 닮아 걸핏하면 '야'하며 소리치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우기며 밀어 붙였다. 말로는 우리 딸아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서든지 사사건건 시기를 많이 하였다. 그 집이 길 건너 방 세 칸 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어찌나 잘난 체를 하던지 꼴이 사나워 내 딴에는 무식한 여편네가 감히 상상도 못하는 고급 악기를 우리 딸 아이가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에와서야 솔직하게 토로하면 유치찬란한 동기가 그 시작이었으니 그 시작부터가 글러 먹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었다. 내 딸아이의 재능을 발굴하겠다는 부모로서 모범적인 의지가 단 1도 없었던 부끄러운 나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과정은 명약관화. 운동 광인 막둥이는 상대와 부벼 대며 땀 흘리는 농구, 축구, 야구 같은 전신운동만 좋아하고 친구들하고 노느라 저녁 밥 때가 다 돼서 내심 혼이 날까봐 넓은 어깨를 쪼그리고 의기소침해진 척하고 슬며시 들어온다. 피부색은 새 하얀 큰 딸 아이와 정 반대로 일년내내 까무잡잡하다. 띠도 어쩜 청색 말이란다. 잘 달리는 말답게 굵고 튼튼한 허벅지로 죙일 뜀박질 하느라 바쁜 아이가 갈색 유선을 따라 중후하게 생긴 거기에 음도 피아노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세심하게 컨트롤 해야 하는 민감한 이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잘할 리가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섯 살 이후로, 둘째는 바이올린이라는 거대한 공룡을 만났다. 엄마의 어리석음은 허공중의 기대가 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마음에 짐을 지어주게 되었다. 책가방에 공룡을 넣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아주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좋아하지도 못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후회했다. 오래전부터. 그런데 그럴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 꾸역꾸역하면서 실력이란게 조금씩 늘어 딸에게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라는 몹쓸 마음) 아이에게 더 연습을 강요했다.
잠깐이었더라면 딸에게도 나에게도 시행착오의 기간이라 여기며 씁쓸한 인생공부라 지나갔을텐데 전전긍긍 오락가락 어정쩡한 시간이 벌써 5년이 흘렀다. 변한 것은 없었다. 5년밖에 또는 5년이나의 단어의 차이가 별거 아니라는 털어버림으로 좁혀지면 족한데 경제적으로 조금씩 버거워지다 보니 투자금이 아깝다는 치졸한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어른의 낯부끄러운 짧고 뻔한 생각과 결말.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막둥이가 나중에 삶의 무게가 힘들게 느껴질 때 거리낌 없이 내게 찾아올 수 있는 엄마의 따뜻한 아름드리 그늘이 되려면 막둥이 가방에서 공룡을 꺼내주어야 하는데 더 깊숙히 넣었다. 아뿔싸.
딸의 표정은 예전같지 않았다. 그 눈빛. 막둥이는 분명 어른이 되고 있었다.
나는 시원하게 바람이 스며들고 적당히 무성한 녹푸른 나뭇잎의 부산스러운 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운 나무의 그늘이고 싶은데 햇볓을 피해 쉬러 온 이에게 직사광선을 내리쬐게 만드는 아무 쓰잘데 없는 나무가 되었다.
사랑에는 권리도 이유도 무게도 없어야 함을 알면서도....... 시간이 아깝다. 아이를 위해 투자한 시간이 아니라 아이 삶을 까먹은 시간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