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월장하다
오래된 작은 정원
사람발길 떨어진 지 오래다
길가로 난 쪽빛 문은
지난 발길의 흔적만 남아 퇴색되고
굳게 닫힌 지 오래다
정원의 꽃들은 돌보는 이 없어
꽃들은 잡초 속에 갇혀
성글게 제 각각 자라고 있다
타발로 피던 수국도 흔적만 남아있고
작약조차 떨어져 잎마저 시들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꽃은 떨어지고 잎마저 시들어
언제 화려한 날이 있었는지 흔적 없어진 지 오래다
정원 안에 울려 넘치던 웃음소리 그립다
뜰안엔 추억과 긴 그리움만 드리우고
연못의 맑은 물 마르자 비단잉어 떠났구나
정원 가득 퍼지든 꽃내음과
다향(茶香) 은은히 퍼져
담장 밖 지나는 이 걸음 멈추게 하였건만
남은 것은 살 떨어지고 낡은 발뿐,
긴 그리움에 얼굴은 초췌해지고
화려하고 맑은 웃음소리 아득한 기억만 남았다
밤 되면 불 밝혀주는 이 없이 어둠만 깊어가고
바람소리에 떨어진 꽃잎만 사운 댄다
누가 어는가 하고 가만히 귀 기울여도
풀벌레 소리만 요란하다
밤은 깊어가고 닫힌 문은 열리지 않으니
꽃들도 그리움에 지쳐
피어나지 않고 떠날 채비 한다
이제 곧 찬바람 불고 풀잎에 찬이슬 맺힐 텐데
그나마 피었던 꽃조차 시들어 가는구나
무성하던 잡초마저 시들어 간다
기다리다 지친 규중 꽃 능소화가
치마단 걷어 올리고 돌담을 타고 오른다
이제 곧 여름도 다 가건만
닫힌 문은 열릴 기색 없어
이대로 시들기 아쉬워하며
사람 그리운 능소화 불그스레 한 얼굴로
월장하여 흐드러지게 흘러내린다
9월의 끝자락을 붙들고
오래된 정원의 문은 닫혀있고
모두들 떠나간다
2024. 9. 5. 작성하였다
죽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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