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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림헌 Aug 26. 2024

#14, 두 번의 재발

그렇게 병이 나아, 봉사와 여행을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우리 곁에는 언제나 도와주시고 돌봐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3개월 출산휴가 후 복직할 때도 큰아이를 돌보아줄 사람이 구해졌다 

우리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이 구해주었다. 

집주인이 지역유지였다. 또 통장이라고 하였다. 개발위원도 하였다. 정말 감투 많이 쓰고 계셨다.

큰아이를 돌 봐줄 분은 좀 연세는 드신 분이지만 건강하셨고 말투가 이북말인지, 강원도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한지역에서 누대를 걸쳐 살고, 가문의  한 파가 공전인지 녹전인지에서 대를 이어 살던 사람들이라

다른 지역말투는 잘 몰랐다 주위사람들이 모두 같은 지역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정말 타 지역의 말투를 모른다. 전라도말이 어떤 투인지 충청도가 어떤 말투인지

북쪽분들의 말과 강원도지역의 말도 구분 못하였다. 대부분 이상한 모르는 말투는 소설책이나 방송으로 

다른 지역의 말을 접했다. 그러나  모두 같았다. 다른 지역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흔히 말하는 지역감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직장에 들어가니 여러 지역의 말들을 쓰는 사람과 

다른 지역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재미있었다. 그게 뭐, 그냥 말투가 다를 뿐이다.


지금도 큰아이를 봐주시던 할머니가 어디 지역인지 모른다 물어볼 필요도 없고 교양 있어 보였다.

아이를 잘 돌보아 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보았다. 그러니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통장이자 지역유지고 개발위원이고 이런 분이 추천하였으니 신분은 확실하고 그냥 감사하다고 맞이하였다.

그렇게 큰아이도 좋은 돌봄을 받았다.


내가 퇴근해 가면 할머니는 반찬을 몇 가지 만들어 놓고 가셨다. 그러지 마시라고 하여도 피곤할 테니 괜찮다고 하시며 굳이 만들어 놓으셨다. 나는 자연히 장을 많이 봐서 할머니께서 가져가시도록 해드렸다.


우리 집 냉장고는 소고기와 명란 등이 많았다. 겨울 되면 대구알도 젓갈을 담아 둔 것이 항상 있었다.

자연히 할머니에게도 나누어 드렸다. 할머니는 큰아이에게 정성을 쏟았다

내가 연년생으로 둘째를 임신하자 출산 달 즈음에 할머니는 그만두셨다.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아랫집 주인의 입주가정부가 우리 아이를 돌보아 주었다.

넓은 정원에서 강아지와 아랫집가정부와 큰아이가 뒹굴고 놀았다.

내가 복이 있는지 아이들이 복이 있는지 워킹맘치고는 아이 봐줄 사람 구하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때 맞추어 준비되는 것 같았다. 


내가 15회 글을 쓰면서 기억이 난 것이 둘째가 18개월에 병이 난 것이 아니었다.

첫 신행집이 76평 저택의 이층에서 시작하였다. 그 집은 온 집안에 경보장치가 되어있어 늦게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경보기가 작동되어 아랫집 주인이 올라오고 하는 소동을 몇 차례 겪었다.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하였다. 


그 두 번째 집이 부유한 지역유지집에서 큰아이를 낳고, 그곳에서 백일잔치를 하고, 다시 그 이웃의 정원 큰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니까 세 번째 집에서 연년생 둘째를 낳고, 그곳에서 큰아이 돌잔치를 하였다. 

그리고 직장 가까운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4번째 집을 구했다. 그 네 번째 집에서 둘째 돌잔치를 하였다.  그 집에서 한밤중 응급실에 몇 차례를 갔으니 둘째 녀석이 물병자리이고 갖 돌을 지나서 2개월 정도가 되었으니 15개월 정도에 입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했다.

이곳에서 아이의 투병생활이 있었고 즐겁게 추억을 만들며 자랐다


15개월부터 시작된 병원생활이 오래도 갔다.

엄청 오랜 기간 동안 병원생활을 하였다. 완치판정 나고 이듬해 둘째 녀석이 형 따라 어린이집에 갔다.

이것도 좀 헷갈린다. 유아원이었나 어린이집이었나 하고 생각해 본다.

담당계장도 하였고 자격도 있으면서 세월 지났다고 가물거린다. 그러나 차이 없다

형 따라 들어간 유아원에서도 업무로 어떻게 어떻게 연결되어 특별 대우받 듯이 두 아이는 잘 다녔다.

때 맞추어 집으로 데려다주시는 분도 계셨다.


큰아이도 머리가 좋은데 둘째가 아이큐가 뛰어나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알았다.

별로 공부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잘했다.

선생님께 불려 갔다. 아이가 시험 볼 때 딴짓한단다. 시험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선생님이 주의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 하였다. 아이는 아무 말도 않았다. 변명하지 않는 이상한 아이다.

모아둔 시험지들을 전부 보았다. 당연히 올백이고, 무엇이 문제란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가 아무 말없이 시험지 끝 한 귀퉁이를 쿡 찌른다.

점들이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시험지 끝 모서리에 잘 보이지 않는데 사람을 그려놓았다.

교과서 가장자리 끝에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그려져 있다.

눈에 갖다 대고 자세히 보니 그림이 차례로 연결되어 슈퍼맨이 하늘을 나르는 그런 동작의 연속이었다.

모든 동작이 한 장 한 장을 연결하면 하나의 동작들이 보였다. 서있다가, 주먹을 쥐고 한 손을 내밀고

다리가 뜨고 망토가 나르고 순차적으로 펼쳐지며 연결되어 확장되는 그림이었다.


아, 이걸 그냥 확 때릴 수도 없고 웃음도 나고 정말 기차 찼다. 정작 당사자인 아이는 덤덤하다.

선생님께 말하지, 문제 좀 천천히 풀지, 이런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 유별나고 기이한 행동과 생각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미술학원에서 전국대회에 나갔다. 대상 받았다. 그림이 우주공상과학이었다.

그림내용도 기발했지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싶었다. 머리에 뭐가 들었을까.

나는 머잖아 내가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학원에서 액자에 넣고 전시하고 그대로 걸어 두었다. 그림을 달라고 하였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책을 끔찍이도 많이 보았다. 

우리 집에는 책이 엄청 많다 내가 시집갈 때 가져간 책이 용달차 하나였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고 두보가 말했지만 나는 용달차 하나의 분량을 

읽고 가지고 시집갔다. 그 이후의 것과 합하면 더 많겠지, 

그것을 두 아이가 장난감처럼 읽고 쓰고 놀았다. 책은 더 많아졌다. 내 시대와 아이의 시대가

다르니 동화책부터 새롭게 사주었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서 하는 말이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기에 생각이 깊어졌지만

만약 내가 어릴 때 철학 관련서적을 좀 더 많이 읽었더라면 염세주의자가 되었을 거라 하였다.

그 아이의 기행이 계속되더니 초등학교 4학년에 아이가 아팠다.


첫 번째 재발이었다

예전처럼 열이 올라 불덩이처럼 되고 약을 먹일 수없어 바로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바로 채혈과 병실이 잡히고 한 무리의 (정말 그랬다) 의사들이 들이닥쳐 아이를 에워싸고

또다시 온갖 의학용어들이 또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이는 첫날은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열이 내리자 의식이 돌아왔고 의사들이 회진 때 또 엄청나게 와서 아이를 빙 둘러싸고

자기네 들끼리 약처방에 대해 이야기들을 하였다.


아이는 예전의 아이가 아니었다. 안 듣는 척하며 눈도 깜짝하지 않고 천연득스럽게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들은 몰랐을 것이다. 이 아이가 이상한 아이라는 것을, 내가 병원에 데려가서 진찰실에서

의사 선생님께 아이의 진료내역 병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병력을 이송받으려고 하였으나 그 아동병원은 문을 닫고 다른 종합병원에 합병되었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같은 재단이었다고 하였다. 병력을 이송받을 수 없으니 그때부터 의사 선생님들은 또 

처음부터 할 요량인 것 같았다.


말없이 눈치 백 단인 아이,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아이는 병원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의사들의 대화를 딴짓하며 다 듣고 있었다.

약이 오면 아이는 약을 먹지 않고 숨겼다.

그리고 책을 읽고 책 끝에 그림 그리고 조용히 있었다.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해도 된단다. 처음 설립한 종합대학병원이라 제약회사에서 끊임없이 약을 권유했다.

실험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선생님들이 세 번에 걸쳐 검사하고 처방받아 

완치되었다. 새삼 약의 효능검사 대상이 될 수없었다.


아이가 그걸 알려주었다. 대화내용을 듣고 논 것이었다.

그때 큰동서가, 아이의 큰엄마란 사람이 병문안 왔다. 병실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발, 한 번만 점을 치든지 철학관에 가 보란다. 우리가 그런 것 안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갔다. 철학관과 점집에 갔다.

철학관,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인문학의 철학이 아니다. 명리학을 말한다.

생년월일을 넣고 기다리니 간략하면서 명확한 몇 마디를 하였다. 사람마다 명운(命運)이 있다고 하였다.


이 아이는 죽지 않습니다. 그냥 몸이 약합니다. 머리가 뛰어나게 좋습니다. 아이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게 가만히 두면 알아서 합니다. 이기적입니다. 


최고의 조언이었다. 군더더기 없고 간략한,

다른 점집에 갔다. 요령을 흔들고 주문을 외우고 한참을 하더니 안 죽어요, 한다.

그리고 조상이 돌보니 부적을 쓰고 굿을 하면 된단다. 

예 알겠습니다. 하고 나왔다. 

그리고 혈액검사가 이상 없으니 퇴원하겠다고 하였다. 의사도 반대하지 않았다. 별처방이 없고

이상 없으니,  그때 아이가 하얀 편지봉투를 가지고 있었다.

뭐냐고 물어보았더니 큰엄마가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주더라고 하였다.

봉투를 열어보니 은행에서 바로 찾은 깔깔한 새돈 천 원짜리 열개였다.

말 그대로 맛있는 거 사 먹으면 된다

앞 병상의 보호자가 그분 누구냐고, 병문안 오면서 그게 뭐냐고 하였다. 조카라면서 병문안 오면서

그걸 주느냐고, 그냥 웃었다. 그분 대학교수 부인이다. 큰동서다

그리고 우린 즐겁게도 잘 지냈다. 간혹 큰애와 작은애가 고집이 세어서 다투 기는 해도 별 탈 없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자랐다. 그리고 큰아이는 유학을 갔다.


두 번째 재발은 군 입대하였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이 지원시켰다.

한겨울, 가만히 두면 논산훈련소나 창원 쪽으로 갈 아이를 최전방  보충대로 넣어버렸다.

지금도 길길이 뛰던 둘째가 눈에 선하다 방학이라 친구와 전국여행도 하고 따뜻한 봄날에 

입대하려고 하였는데 그랬다고 아버지에게는 말 못 하고 만만한 나에게 씩씩거렸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훈련부대 소대장의 전화였다. 아이가 아프단다. 

이 상태로 못 견디면 의가사제대를 해야 한단다. 동의를 구하는 거다

또 장황하게 설명했다. 병을 앓았지만 괜찮다. 약을 먹이면 됩니다. 항상 몸을 보하는 약을 먹이는데

그쪽의 날씨가 너무 춥고 훈련에 아이가 힘들었는 것 같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하였다.

소대장은 이런 아이를 군대에 보내면 어쩝니까 한다. 

죄송합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였다. 협상을 했다. 

보약을 보내겠다고, 소대장은 한참 후에 말했다. 원래 외부에서 약을 반입 못합니다, 하였다.

좋은 소대장을 만났다. 복이었다. 살면서 또 좋은 사람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한겨울 완전무장하고 훈련받던 녀석이 쓰러지고 나는 또 단골 한의사에게 말씀드려 

약을 지어 보내었다. 약은 군생활 내내 인수인계하며 약이 전달되어 무사히 전역하였다.

최전방 자대 배치되어 열심히 군복무 마치고 건강하게 제대하였다.


큰 아이도 비슷한 시기에 방학을 맞아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또 남편이 지원시켜 동생과 같은 최전방훈련소에 들어갔다. 

우리는 2년이 넘는 시간을 토요일만되면 운전하여 두 아이를 면회 다녔다.

둘째와 나는 평생 한약을 달고 살았다. 큰아이와 남편은 한의사 선생님이 약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왔으니 반재만 지어 드린다고 하여, 지어 와서 먹였다. 건강한 사람들이다.


대신 요즈음은 체질도 바뀌고 하여 -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한약대신 영양제를 먹는다. 식품보조제 등을 먹는다.


둘째는 겁이 나서 유학을 보내지 않았다. 약 때문에 그랬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중국에 있는 대학에 가더니 그곳에서 다시 육로를 따라 긴 여행을 하였다. 중국을 여행하고 네팔로 건너가서 인도로 가고,

 

돌아서 다시 아시아 남쪽을 접수했다. 이때가 가장 걱정스러웠다. 약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네팔을 거쳐 인도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그리고 귀국하여 국내유명한 그룹 회사에 취업하여 1년을 다니더니 퇴직하고 모은 돈을 다 가지고 다시

출국하였다. 이번에는 공부하러 영국으로 간 것이다. 방학에 돌아오는 길에 오리엔탈루터로 터키를

거쳤다. 집에 와서 몸보신 체력강화하고 국내봉사활동 다니다 다시 출국하였다.

그리고 또 호주로 갔다. 과연 마무리는 어떻게 될는지...

이것이 나와 둘째 아이의 긴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중에 아이와 나를 

중심으로 아니 우리 다섯 가족을 중심으로 아이 살리기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이었다

그 속에 가족의 삶, 어머니의 희생, 가족의 버림(생명보다 재산이 중요한 분),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준 

직장동료, 생면부지의 곱디고운 비구니스님, 이웃들, 간호사님들, 의사 선생님, 아이들을 돌보아 주신 분들,

무엇보다 둘째 고모님 외에도 많은 분들의 손길이 아이를 함께 구해내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병원비 빌린 것을 갚기 위한 힘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행복하였고 살만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지금 이 글을 읽어주시고 라이킷을 해주시고 위로와 격려의 글들을 남겨주신 분들 감사하고 

진정 어린 마음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글을 올리며 아, 이것이 진정 슬픔과 원망과 미움과 고마움 등이 썩여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 되는구나.

나는 힘을 모아 가슴의 응어리를 밤하늘에 별로 쏘아 올렸다.

이야기보따리 중 인생의 한 부분이 빠져나가며  마음에는 막혔던 구멍이 뚫린 것이다.

#재발 #군복무 #출국 #유학 #보살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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