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당신의 이해를 구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산은 언제나 그곳에서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지켜보았으며 무수한 일을 감내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기에 이 글은 적히고 있는 것이다.
산,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산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 산’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주 먼 옛날의 사람들은 산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호기심을 가질 지력조차 없었고, 그 후의 세대는 그저 이 산의 능선이 어느 동물과 비슷한 생김새인지 따져보기만 하였고, 시간이 더 흐르고선 이 산속에서 한 선비와 선녀가 사무치는 사랑에 빠졌노라 노래를 하는 것이 인간의 최선이었다.
인간은 산을 그리고, 이야기하고, 노래하였다. 인간의 피사체가 되는 것은 산의 숙명이었다. 산은 이곳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인간의 터전이 되었다. 산은 웅장하고 안락했다. 편안하고 경외시되었으며, 화려하고 소박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산을 경애하였고 솜씨 좋은 자들은 그림으로 기록하고, 말씨 고운 자들은 산에서 있을 법한 예사롭지 않은 일들을 꾸며냈다. 산의 넉넉한 품에서 노래하였고, 또 어떤 이는 산에서 삶을 끝맺기를 기원하였다.
산은 인간의 이야기를 품어주었다. 그것은 산의 동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를 지어내건 산은 흔쾌히 그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주고, 주인공이 되어주었다. 어차피 인간이란 자신보다 짧은 인생을 살아내는 자들이었고, 산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즐길 뿐이었다. 그들이 흥에 겨워 웃고 떠드는 소리에도, 한 맺힌 처절한 절규에도, 애절한 흐느낌에도 산은 나뭇잎을 귀 삼아 듣고, 자신의 봉우리들로 하여금 메아리쳐 답해주었다.
산이 인간의 모든 삶을 품어내기 버겁다고 생각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인간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산에서 낭만보다 재화를 좇았다. 그들은 산에서 삶을 찾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기만을 바랐다. 산은 자신의 나무 몇 그루 베어가는 것은 그리 괘념치 않았다. 나무를 길러내는 힘은 산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재주였다. 전에 본 적 없는 썩지 않는 물건들을 버리고 가는 자들도 크게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버리고 가는 자들이 있으면 주워가는 자들이 있었고, 미처 발견되지 못한 것들은 산이 감내하면 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다만 흙을 깎아내고 파내는 것은 제아무리 산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산은 고유했다. 제 살인 흙이 깎여 나가는 것은 다른 산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인간은 산이 내려다볼 수 있는 어느 얕은 바다를 산의 살들로 채워넣기 시작했다. 그 바다는 오랜 시간 동안 산의 곁에 있으며 때로는 바닥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득 찬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친우였다. 천지의 유구한 역사를 함께 마주해온 친우의 일부가 제 살로 밀려 들어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을 때 산은 절망했다. 그 절망이 하늘에 닿을 때쯤 하늘은 산의 마음을 삭여주려 거대한 비를 내려주었다. 산의 봉우리마다, 바위마다, 나뭇잎마다 빗물이 젖어 들어갔고, 산은 스며들어오는 물을 받아내며 꼭 인간의 눈물 같은 것을 자신이 흘린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보았다. 산의 분기가 잦아들 때까지 퍼붓던 비는 결국 산의 일부를 무너뜨렸다.
쏟아진 자신의 일부를 바라보며 산은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방도가 없었다. 무너진 흙을 붙들 나무들이 베어진 채로 남겨진 자신이었기에, 이토록 깎여 나간 자신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산은 자신의 잔해를 바라만 보았다. 그제야 경각심을 느낀 인간들은 산의 살을 쓸어 담고, 엉성하게나마 제자리에 얹어놓고는 쇠 울타리를 박아 버렸다. 제 살이 뜯긴 자리에 이물질이 박히는 외상을 입고서 산은 그토록 초라한 가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또 한 세월이 지나갔다. 외상으로 인한 내상이 무뎌져 산이 다시 생기를 비추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산을 찾고 이전 세대의 과오를 잊은 듯 해맑은 애정을 표했다. 산과 함께 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어떤 이는 공중으로 물체를 날려 영상으로 산의 모습을 남기기도 하였다. 취하는 방식이 다를 뿐 사람들은 산과 함께 하고자 하였다.
무뎌진 마음으로 다시 사람을 사랑하던 산이었다. 어느 날에는 손에 잔뜩 장비를 쥔 사람들이 산을 찾았다. 산의 여러 면을 살피며 그들은 무언가를 기록하고, 계산하였다. 이들은 해와 달이 몇 번 더 뜨고 진 후 산과 어울리지 않는 멀쑥한 복장의 사람들 한 무리와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산을 보지 않았다. 산의 앞뒤에 자리한 도시들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손뼉을 치며 서로를 축하했다. 그렇게 날이 점점 더워지던 계절이었다.
<경> 본산 1호 터널 개통 <축>
산의 허리춤에 거대한 천이 펄럭였다. 늙은 사내 둘은 굵은 땀을 훔치며 멀리서도 가장 잘 보일만 한 곳에 자리한 큰 나무 두 곳에 천의 끝자락을 동여맸다. 둘 중 나이가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사내는 손을 두 번 탁탁 털고는 주머니에서 사각의 물건을 꺼내 자신이 동여맨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갔다.
산은 두려웠다. 인간이 폭탄을 가져와 제 일부를 폭파하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고, 허무하게 뚫려 버릴 자신이 애석했다. 무엇을 위해 자신을 뚫고, 그들이 무엇을 축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이 인간에게 매정한 적이 있었나. 심술을 부린 적은 없었나. 헤아리지 못하고 돌려보낸 마음이 있었던가. 제 잘못이 아닌데도 제 과거를 곱씹어 보았다. 어느 해에는 비록 지쳐서 더 많은 열매와 나무를 주지 못한 적은 있었을 것이다. 지난날, 미처 그늘을 내어주지 못한 까닭은 사람을 미워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 와 까닭을 생각해본들 아무런 소용은 없다.
관통된다면 새로운 세상을 이어줄 것이다. 산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