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No.9
그 눈은 생기로 가득하겠구나.
셋째 날, 맛있는 커피를 들고 나선 뒤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목적지로 이동했다. 그곳은 바로 광치기 해변인데, 마치 중간다리처럼 성산일출봉과 제주도를 잇고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더불어 사진으로 미리 봤을 때 이전의 바다들과 달리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기에, 이날의 첫 번째 장소로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주차를 마치고 나왔는데, 바다는커녕 웬 공터로 가득 차있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내비게이션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반대편 주차장으로 도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주도는 특별하지 않은 공터마저도 아름다웠으니, 좀 더 걸리더라도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중간에 함께 곁들인 커피는 그런 나의 감각을 깨우는 촉진제가 되어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줬다. 그리고 그 산뜻함에 괜히 가는 길 마주치는 사람들도 반가웠던지 과일을 팔고 계셨던 어르신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그 어르신이 미소로 내 인사를 받아주셔서 뻘쭘할 뻔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고, 마침내 발걸음은 본래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됐다.
역시나 찾아온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은 여지없이 자연의 찬란함을 선사해 주었다. 모든 구성들이 각자의 색채를 가진 채 조화롭게 펼쳐져 있었고, 그 어느 것도 예외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멀리 감치 보이는 성산일출봉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하늘의 공백을 채워줬고, 초록빛으로 가득한 바위들도 땅의 곳곳을 메워줬다. 동시에 바위틈으로 잔잔히 흘러가는 바닷물은 경이로움에 들떴던 마음을 한결 차분하게 만들어 줬다. 오늘의 사색을 누려보려는 내게 세상이 마련해 준 또 하나의 선물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방금까지 오는 길 찬찬히 둘러봤던 것처럼 동일한 시간을 가져봤다. 당장 앞에 밟고 있는 바위는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멀리 있는 곳까지 충분히 눈에 담아봤다. 물론 걷는 도중에 바위에 낀 이끼에 미끄러져 휘청일 때도 있었지만 결코 이 광경이 주는 감흥을 빼앗지 못했다. 이어서 서있을 수 있는 곳까지 가, 눈을 감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원 없이 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충분히 가진 후에 다시 눈을 떠 옆을 바라봤는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한 명의 낚시꾼이 내게 영감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먼저 그는 무엇을 낚고 싶어 하는 걸까 궁금하면서도 보자마자 바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떠올랐다. 일차적으로는 홀로 낚시하는 모습과 한 폭의 그림 같은 주변 바닷가 배경이 그렇게 이끌었다고 여긴다. 동시에 항해 속 독백을 통해 노인의 생각을 알아갈 수 있듯,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또한 궁금했다. 물론 사활을 걸어 어부 인생 중 가장 큰 대어와 사투했던 노인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나, 그들 가운데 공통분모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그로부터 떠오른 질문들을 바탕으로 사색을 이어갔고, 그들 모두 '영감을 낚는 자'임을 낚시 과정에서 비로소 깨닫게 됐다.
당장 무엇을 낚아챌지 바늘에 꿰여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도리어 아무 일도 안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 소설 속 노인은 수십일이 넘는 기간 동안 어떠한 수확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포기'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았던 건, 낚시에 대한 그들 각자의 영감들로 '묵묵함'이 돋보였기에 그렇다. 나아가 준비부터 그 결과까지 모든 게 곧 ‘물고기’라는 영감을 낚는 과정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노인은 자신이 그 소산들이 주는 힘에 자부심을 품어 치열한 사투에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았던 것이고, 내 앞의 낚시꾼은 노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만의 여정에서 유유히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멀리 있어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더라도 헛, 분명 그의 눈은 생기가 있겠다는 짐작도 해보게 됐다.
마지막으로 나 또한 영감을 낚는 자로서 생기 가득한 눈을 갖추면 어떨까 떠올려봤다. 분명 내 외적인 요소들은 시기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부정할 수 없지만, 그 눈만큼은 갈망과 자부심으로 가장 뚜렷할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오직 이 여정에서만 얻을 수 있으니 찬란한 빛깔로 돋보일 것이라 본다. 그리고 마저 그 모습을 충분히 연상해 보며 광치기 해변 속 사색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이 노인의 신체 중에서 노쇠하지 않은 곳이라곤 오직 눈뿐이었다. 그 눈동자는 바다와 같은 푸른 색깔이었고, 눈빛에는 늘 즐거움과 지칠 줄 모르는 기상이 감돌고 있었다." - 노인과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