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No.23
그저 무리 안에 자족했던 풋내기에서, 이젠 삶을 온전히 사랑하게 된 사람으로 거듭났구나.
오늘은 진짜 내 본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구나. 지금부터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마지막의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양치질과 세안 및 짐 정리 등 나갈 채비를 하는 일, 숙소 바깥으로 나가는 길, 먹고 마실 장소들을 찾는 순간들까지. 하염없이 더 오래 머물고 싶더라도 이제는 고향의 내음과 음식들을 그리워하며 어느 정도 그 마음을 꾹꾹 눌러줄 필요도 있었다.(물론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지만) 그나저나 SW(친구) 이놈은 한층 무거워진 몸뚱이를 어기적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이를 부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덤덤한 성향대로 아직 덜 풀린 눈꺼풀을 푸는데 집중하고 있는지. 분명한 건 오늘 여기 호찌민시에서 돌아다닐 장소들을 그가 잘 알고 있으니, 여행을 누리려는 마음만큼은 확실한 듯했다. 그러니 그 계획을 붙들고 있는 친구와 전처럼 짐들을 로비에 맡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이 마지막 순간을 소중히 누릴 필요가 있었다.
어제와 비교했을 때 오늘의 내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다. 좁은 보행자 도로를 까치발 들며 정신없이 이동했던 순간에서 하나하나 크고 작은 거리와 건물들을 눈에 담아 가는 시선으로부터, 쉴 새 없이 빵빵거리는 경적소리의 불규칙적인 메들리 앞에 경탄을 금치 못했던 가슴에서 반대로 담담해진 마음가짐까지 말이다. 더불어 능숙히 장소를 검색하며 택시 오기까지 자연스레 기다리는 있기에. 그러고 보니 나름대로 이곳의 생활환경도 한국과 비슷한 면이 많구나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상태가 어떠하든 여행을 귀히 여기는 마음은 동일하다는 걸 고백한다. 틈틈이 사진을 찍어가는 나의 두 손과 그렇기에 여전히 SW(친구)보다 몇 걸음 뒤만큼 거리 유지하는 두 발이 이를 증명했다.
먼저는 현지 맛집에서 반쎄오, 팟타이로 마지막 점심 식사를 가진 뒤, 주변에 있는 카페로 향하게 됐다. 카페인이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아 풀려버린 눈을 깨우고, 습하디 습한 날씨로부터 잠시 피할 자리를 찾으려는 게 주목적이었다. 동시에 여행이니 베트남 감성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어, 그 끝에 걸맞은 장소 앞에 도달하게 됐다. 특별한 이벤트는 없지만(어쩌면 없는 게 우리에게는 나은) 필요한 멍과 각자만의 생각에 머물며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자리를 지키는 카페 종업원들이 계속해서 비어있는 물 잔을 채우는 소소한 이벤트도 있긴 했다. 궁금해서 그 이유를 찾아보니, 이게 베트남의 색다른 문화에서 비롯됐음을 찾아냈다. 덕분에 이 더위 속에서도 탈수 현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구나 싶었다.
충분히 쉬며 땀도 식힌 우리는 연이어 이 순간을 누리기 위해 대표명소인 "사이공 중앙 우체국"일대로 자리를 이동했다. 호찌민시는 베트남 경제도시로 불릴 만큼 크기에 모르는 명소들로 가득하지만, 짧은 시간 관계상 가장 잘 알려진 이곳에 이른 것이기도 했다. 혹시나 더욱 구체적인 이유를 물어본다면 '특별히 없다.'라고 답하지만, 그렇기에 '소소한 영감'을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무의식 중 머물렀다고 또한 답해본다.
도착한 뒤 전반적으로 돌아다니며 굵직하게 느낀 소감은 두 가지로 추려졌다. 그중 첫째로 모름지기 지속가능한 도시의 중요한 조건은 원활한 '유동인구'에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시민 외에도 수많은 외국인들이 곳곳을 향유하는 모습들이 곳곳에 포착되었다. 놀랍게도 베트남 관광객의 상당수인 한국인들은 육안으로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휴양'이 주목적이라서 그럴까.). 도리어 그게 나로서 익숙한 환경을 넘어 색다름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베트남 또한 한국 못지않게 '커피'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내면 뿌듯해하는 편인데, 검색만 해도 빼곡히 나와 선택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고심 끝에 결정지은 곳은 전문적으로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는 로스팅 카페였으니. 이 소소한 감흥을 낯선 이 땅에서 누리게 되어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 소중한 시간은 정차 없이 빠르게 흐른다는 걸 상당수가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분명 아까까지 깊은 습기를 머금은 무더운 대낮의 연속을 걸어 다녔는데, 심심풀이로 들린 백화점에서 나왔더니 야경 도시가 우리를 맞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오직 공항을 향해야 한다는 게 슬플 따름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저녁만찬을 가질 시간은 있으니,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래 보며 택시를 기다렸다. 눈을 들어 깜깜해진 저녁 하늘을 바라보니 저 멀리 보이는 높은 건물이 갖가지 조명들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마침표를 찍더라도 아쉬워하며 하지는 말라는 듯, 끝까지 영감을 찾아가는 사색을 붙들라는 신호일까.
그래. 그동안의 여정 속 여러 감정을 품으며 사색을 이어왔지만, 그 어디에도 '미련'만큼은 남기지 않았지. 오히려 지금은 영감의 보따리를 잔뜩 챙기며 떠나기 전에는 따뜻한 '약속'도 남겨봤지. 그저 무리 안에 자족했던 풋내기에서, 이젠 삶을 온전히 사랑하게 된 사람으로 거듭났구나. 그렇게 영감으로 물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날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우린 공항에 도착해 라스트 디너를 가졌다. 처음에는 현지 식당에 찾아가 볼까 했지만, 북적이는 분위기에서 낯선 식사는 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정돈된 꼬장으로 색다른 선택지가 마련되었다. 그건 바로 공항 밴치에서 배달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방금 되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한 사람치고 다음 행보가 신박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같이 웃으며 보낼 수 있는 친구와 여행하고 있다는 게 참 다행이기도 했다.
탑승 수속을 걸쳐 자리에 앉으니, 이제는 진정 작별을 고할 때가 이르렀다. 푸꾸옥에서는 "영감을 만끽했으니, 다음엔 내가 나눠주겠다."라고 약속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말을 남길까. 이륙이 시작되어 기내 불이 꺼졌고, 어느덧 호찌민시 야경도 점점 시야에서 흐릿해지니. 이번에는 또 다른 약속의 씨앗을 그 땅에 심어두었다. "때론 힘겨워 가끔은 지더라도 돌아갈 길을 알고 있기에, 이 길만큼은 결코 잊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