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No.22
분명 내 안의 '사색 메들리(medely)'는 곧 나로 하여금 이 도시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신호임을 깨닫도록 했다.
마침내 우리는 푸꾸옥 섬을 떠나, 다시 경유지였던 호찌민시에 도착했다. 이전처럼 짧은 기간 머문다는 점은 동일하나, 하루를 숙박하기 위해 도심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는 곧 호찌민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공항 바깥을 살짝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의 '기(氣)'는 기하급수로 빨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경적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오토바이들, 이에 비해 아주 협소한 보행길 속 위태로이 걸어가는 우린 꽤나 주눅 들었다. 그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숙소를 잡아놨다는 점에서 정말 다행이었으니. 그러는 한편 한 가지 이곳의 분명한 역순을 목격하게 됐다. "여긴 오토바이, 차량, 보행자 순이구나." 따라서 오직 지금으로선 이 묵직한 짐덩이를 방 안에 던져놓은 채 한숨 돌리는 것만이 주요 관건이었다.
어떻게든 이 낳선 거리를 헤치고 나니 숙소 로비로 도착하게 되었다. 확실히 저 밖의 북적이는 분위기와는 달리 고요해 차분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어서 예약확인을 진행하면서 옆을 보니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별다방 로고가 보였다. 대개 난 무언가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 한적함을 한껏 필요로 하는 인간이니. 언제 또 여기 와서 음료를 마시겠냐는 마음에 '주문할까?' 내심 고민했다. 하지만 이따가 저녁을 먹어야 하니 이번애는 한 번 자중해보기로 했다.
드디어 방에 들어가 내 손이 옥죄고 있었던 캐리어를 놓아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침대에 대(大)자로 몸뚱이를 던진 채 축 늘어져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이게 자유지... 자유야!'라 속으로 외치며, 수축이완되는 이 순간을 만끽하는 시간을 가져봤다. 어쩌면 SW(친구)가 밥 먹으러 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난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저녁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 며칠간 내리 베트남식 요리만 먹어와서 '쌀국수', '팟타이', '반쎄오' 등의 익히 아는 메뉴들은 쳐다도 안 봤다. 그랬다고 다른 특별한 음식을 찾기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을뿐더러 머리를 굴리기엔 둘 다 피곤한 상태였으니. 그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고민 끝에 가장 만만한 햄버거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동시에 문득 이곳 현지인들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밖으로 나오고 난 조금의 주저 없이 그랩(Grab)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확연히 '저렴한 가격'은 우유부단한 면이 있는 내가 단호히 선택을 내리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감사하게도 이동하는 동안 놀란 가슴 추스르며 적응하랴 앞만 봤던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도시 곳곳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거리를 매우며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바이커의 모습들이 비쳤다. 그 오토바이 무리 중간마다 한두 대씩 들어간 차량들, 글씨는 도통 알 수 없지만 베트남어로 채워진 간판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있으니 서울 도심 못지않게 밝은 아경이 연출되었다.
그렇게 거리들을 스쳐 지나가니 목적지인 햄버거 집에 이르렀다. 한국에는 없는 패스트푸드점이라 맛은 어떨까 하는 궁금함은 잠시일 뿐, '제 때 먹는 저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무던함 덕분이었을까.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니 이제는 보행길을 거니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목격되기 시작했다. 물론 현지인이니 아무렇지 않게 가는 길을 향했겠지. 그러나 왠지 모를 동질감도 들기도 했다. 즉, 약간 그들에 대해 '을(乙)'의 입장으로서 헤아려 본 생각이라 표현해 본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가 물어본다면,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다. 그저 돌아가는 길 별생각 없이 구경해도 꽤 충분한 여행이지 않냐 제차 물어볼 수도 있겠다. 또한 내가 이 도시 속 사람들의 정서를 또렷이 파악할 일은 전무하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 내 안의 '사색 메들리(medely)'는 곧 나로 하여금 이 도시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신호임을 깨닫도록 했다. 여기 식당 의자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내 모습부터 스쳐 지나가는 각기 존재들로 시선이 옮겨지는 순간까지. 그 어느 것도 부자연스럽거나 위태로워 보이는 영역은 없었다. 그렇기에 분명 난 외국인이지만, 마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듯 해 소소한 기쁨도 들었다. 그러니 짧은 하루라도 값지게 보내겠다는 마침표와 함께, 일단 나보다 덤덤한 친구(SW)와 스몰토크 속 허기진 뱃속을 달래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