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이래?
정신간호학을 배우다 보면 인간 상실경험과 관련된 '퀴블러로스-애도의 5단계'가 나온다.
퀴블러로스는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연구(1969)를 실시한 결과, 인간이 무언가 상실(비극)을 경험할 때의 감정과 행동을 다섯 단계로 정의하였다.
개인에 따라 일부 단계를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순서 또한 같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냥 보편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 사별 등)'을 마주하면 대게 이런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뇌종양 진단을 받았을 때의 나는 아마도 '분노'에 머물렀던 것 같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교 신입생은 성인으로서 누리는 자유에 비해 가족으로부터 받는 지원과 돌봄이 월등히 많다. 자유와 권리는 확대되었는데 의무는 비슷한 상황이라니, 학업보다는 각종 여가활동(?)에 흠뻑 빠지기 좋은 시기이다.
갓 스무 살,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여느 또래와 다르지 않게 '성인'이라는 권리를 마음껏 누리며(= 미팅, 선후배 모임, 동기 모임 in 술자리) 신나는 새내기 생활을 했다.
세상 신나던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어느 날부터인가 내게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양상의 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마치 '종'인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머리 안의 무언가가 정신없이 진동했다.
첫 두통이 시작된 지 1~2주 차가 되자, 나는 아침마다 속이 매스꺼워 헛구역질을 하면서 기상하기 시작했다.
증상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내 방에 속을 게우는 지경에 이르렀고, 알바를 하다가 영업장에 토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태어나 처음 구한 아르바이트를 채 한 달도 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걸음걸이도 점점 이상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 나의 종양은 소뇌 부위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운동기능을 담당하는 소뇌가 눌리면서 걸음이 이상해졌었던 것이다.)
나는 원래도 깨말라였으나, 두통과 오심에 시달리며 한 달 가까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고 10kg 가까이 살이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증상이 생긴 지 한 달째 되던 어느 날, 나는 '설마' 하는 마음 반 '수액이나 맞아야지' 하는 마음 반으로 응급실을 찾았다가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되었다.
처음 응급실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딱히 믿기지도 않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진단명이고 뭐고 일단은 내 두통을 가라앉혀준 뇌압 조절 약물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던 것 같다.
반면, 엄마는 딸에게 닥친 또 한 번의 고비(?)에 깊은 한 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빠르게 병원을 알아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충격은 잠시, 대처는 빠르게. 이래서 다들 경력직을 원하는가 보다.)
응급실에서 급한 조치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엄마는 바로 입원 준비에 정신이 없으셨다.
그와 달리 나는 입원 준비를 뒤로하고 무작정 와르르 퍼즐을 엎어놓고 맞추기 시작했다.
진단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수술 과정과 그 이후에 예정된 것들(예를 들면 타는 듯한 갈증, 통증 등)이 너무 막막했기에 차분히 나를 다독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진정이 잘 안 됐다. 그때부터 화가 났던 것 같다.
약물의 효과는 일시적이었기에, 다음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또 매스꺼움에 시달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는 엄마한테
"왜 나만 이런 일이 일어나?"
라고 울면서 얘기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도 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철이 없었다.
그 당시 내 주위엔 수술력이라고는 쌍꺼풀 수술뿐인 사람이 전부였다. 남들 다 하는 쌍꺼풀 수술은 하면 예뻐지기라도 하지 이 수술은 아프기만 한걸.
인생을 살아온 시간이 짧았던 나는, 그 편협한 기준만 가지고 억울함에 난리를 쳤던 것이다.
원래 세상은 공평하면서도 불공평하거늘... 공평한 세상만을 믿고 자랐던 나는 이것을 어디에 따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방학 동안 계획했던 모임, 스펙 쌓기를 위해 신청했던 봉사활동을 모두 취소했다. 억울했다.
친구들이랑 처음으로 엠티를 가려고 했는데, 그것도 미루게 되었다. 너무 짜증이 났다.
입원하여 약물치료를 하니 매스꺼움이 없어져 마음껏 음식을 먹는 것이 기쁘면서도, 수술을 위해 머리를 밀어야 한다니 화가 났다.
수술 당일 아침, 일찌감치 도착한 수술장 입구가 구면(?)이었기에 긴장보다는 '마취 풀리면 엄청 아프고 엄청 목마르겠지'라며 마지막까지 불만이 가득했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을 되찾자 오한과 통증과 어지러움 등등 온갖 감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리고 이내 내가 중환자실에 누워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이 되면 중환자실 실습을 나간다고 했는데, 환자로 먼저 드러누워 있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힘들고 목마르고 아팠기 때문에, 회복 과정에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기분이 나빴다.
수술 직후 한두 시간을 통증에 시달리던 나는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고, 비로소 내 주위의 수많은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오른편에 의식 없는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면회시간마다 보호자들이 울면서 아이를 쓰다듬었다.
나와 맞은편의 할머니는 지긋한 연세에 가족들과 떨어져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셨다. 그런데 간호사들은 다른 환자를 처치하느라 바쁜 나머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외롭고 정신없는 혼잣말이었다.
중환자실 입구 끝까지 모두 침대가 비치되어 있는데 빈자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리고 침상에 누운 환자의 연령대는 제각각이었다. 불행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찾아들었다.
내가 중환자실에 머물렀던 시간은 딱 하루였으나, 그 짧은 시간에도 병상은 쉬지 않고 바뀌었다. 회복되었거나 사망한 환자가 자리를 비우면 빈자리는 이내 새로운 중환자로 채워졌다.
온실 속 화초처럼 내내 평온하게 자라왔던 나에게 중환자실 광경은 충격이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며,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달았다. 슬픔과 아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을 왜 나는 몰랐을까.
그것은 아마도 충격요법과 비슷했다.
내 생에 가장 강렬한 상실을 맞이하며 한껏 붕 떠있던 나의 마음은, '어려움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난 뒤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만 충격에 의하여 분노가 잠시 가라앉았던 것이었을 뿐, 내가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좋은 수용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다음 단계가 찾아왔다. 우울이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