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미 시마바라(南原島) 코스는 나가사키에서도 가장 끝 지점인 시마바라 반도의 남쪽에 있는 시골 마을이라 시작점을 찾아가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카모메(CAMOME)라는 이름으로 작년에 개통한 서부 규슈 신칸센을 타고 이사하야역으로 가,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오바마라는 곳으로 간다. 미국 대통령과 같은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마을은 하수도관에서 펄펄 끓는 김이 올라오는 온천 마을이다.
30여 분을 기다렸다가 구치노쓰(口之津)항행 버스를 탄다. 시골 버스답게 승객들 대부분이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들이고, 거동이 불편하니 버스를 오르내릴 때마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버스 요금을 일일이 현금으로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니 말해 무엇하랴? 거의 3시간 만에 구치노쓰 항 출발점에 도착한다.
<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시작점 >
구치노쓰(口之津)항은 유럽의 무역선이 드나들던 곳답게 꽤 규모가 있는 항구이다. 붉은색의 아치교가 도시의 상징인양 우뚝 서 있다.
1567년 첫 닻을 내린 남만인(포르투갈인) <베이가> 선장을 기념한 동상이 항구 공원에 바다를 등지고 서 있다. 첫 개항지에 올레의 시작점이 있어 상징적이다.
< 포루투칼에서 온 베이가 선장 동상 >
인증 사진을 찍고 출발했는데 한참을 가도 간세와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항구 주변이 워낙 번화한데다가 올레에 대한 어떤 안내도 없다. 파출소에 들어가 물어보는데도 순경들은 물론 행인들도 잘 모른다고 한다. 시마바라 코스와는 달리 올레가 있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걸로 보아 그리 활성화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접근하기도 힘들고 또 시작에서도 만만치 않으니 걱정이 하늘만큼 쌓인다. 이내 규슈올레를 쉽게 생각했던 우리를 꾸짖는 것 같아 겸손해지기로 한다.
결국 원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 차분히 리본을 찾아 한발 한발 겸손하게 집중하며 걷는다. 가끔 이야기에 빠지다 보면 이정표인 리본을 못 봐 길을 잃곤 했는데, 오늘은 초반부터 헤매기 시작한다.
시작은 어설펐으나 곧 걷는 자의 페이스를 찾는다. 광활한 바다 풍경을 뒤로 두고 항구를 돌아 길을 건너 마을로 향한다. 전통적인 일본 기와집 주택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 서 있는 모습이 군산에서 느꼈던 분위기와 사뭇 닮아 있다. 가옥 구조며 상가의 간판, 거리의 사람들, 밭에 심어놓은 농작물도 모두 익숙한 모습이다. 아마도 우리의 문화 속에 일본 문화가 많이 스며 들어 있었던 듯싶다.
골목 중간 지점쯤 오니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는 오래된 양조장 건물이 보인다. 애주가이기도 하고 한동안 술 만들기 강의를 열심히 들으러 다녔던 남편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곳에서는 쌀로 만들었다는 일본주를 대병에 담아 판매한다. 배낭에 짊어지고 가기에는 꽤 무거울 텐데, 상관없다고 하며 술을 사 가방에 넣는다. 좋아하는 술을 사서인지 발걸음도 씩씩해 보인다.
< 구보 양조장과 쌀로 빚은 술 >
마을 끝 지점에 고요한 야쿠모 신사가 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고, 신사 안에는 꽃이며 향이 점화되어 있다. 이들은 삶 자체가 신앙이고, 신앙이 곧 삶인 것 같은 자세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삶의 경건함을 보게 된다.
구릉 같은 산을 넘으니 너른 밭이 나오고 인공저수지인 노다 제방이 보인다. 화산재가 쌓인 토양이라 물이 잘 빠져 그런지 밭에 주로 심어진 작물은 양상추와 대파이다. 밭의 상태도 여러 모양이다. 어떤 밭은 수확을 앞두고 냉해 방지를 위해 소담스러운 양상추 위에 하얀 비닐을 덮은 곳도 있고, 수확을 끝내고 다시 흙을 갈아 파종을 앞둔 붉은 색의 밭들도 있고, 한쪽에서는 이제 막 수확하는 농부들이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는 밭들도 있다. 기후의 특성상 이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농부들에게 “곤니찌와”하고 인사를 건네니,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잠깐 들고 인사에 짧게 답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렇게 길은 양상추밭과 대파밭 사이의 밭둑길을 가로지르며 걷게 한다.
잡초가 우거진 밭을 갈아 씨를 뿌리려 하는지 노부부가 낫과 쇠스랑을 들고 밭으로 걸어온다. 그 모습을 보며 남편은 “다가오는 봄, 우리들의 모습이네.”라고 한마디 툭 건넨다. 올레길을 걸으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데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서 동질감이 느껴진다.
이 마을도 밭에서 일하는 대부분이 노인들이지만, 사는 집의 규모며 자동차들, 농기계 등이 유복해 보이는 걸로 보아 농가 수입이 꽤 높은 동네처럼 보인다.
마을과 밭을 지나 다시 산으로 오르며 성황당같은 작은 신사를 또 만난다. 어김없이 꽃과 향초가 꽂혀 있고 주변은 정갈하게 청소가 되어 있다. 매일 마을의 누군가가 정성을 들이는가 보다.
이 산의 이름은 노로시야마(野呂志山)이고 해발 90미터로 푸른 바다와 아마쿠사 제도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산에서 내려와 바닷가 마을을 가로질러 화산흙의 너른 밭 사이로 걷기도 하고 동백나무 숲과 양상추, 대파밭의 둑길을 걸으며 숲이 주는 녹색과는 다른 싱그러운 푸름에 빠져본다. 다행히 겨울이라 농부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지만, 한창 바쁜 농번기에 걷기는 미안할 길이다.
온종일 너른 밭과 마을 사잇길을 걷다가 끝나나 싶은 지점에서 길은 바다로 향한다. 메이지 13년(1880년)에 점화되었다는 구치노쓰 등대가 나온다. 구치노쓰(口之津)항에 드나드는 수많은 배들의 안내자 역할을 했을 등대는 곶의 끝에서 흰색으로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배경이 되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 1880년에 점화된 구치노쓰 등대 >
평탄하게 보도블록이 깔린 바닷길이 끝나며 기암괴석의 현무암이 넓게 펼쳐진 암반으로 향하게 한다. 바로 옆에서 파도에 쓸려오는 푸른 바닷물이 철썩이고, 그 바닷물에 깎이고 떨어져 반들반들해진 바위들을 디디며 걷자니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짜릿하다.
바다에서 나와 마을로 들어가니 영화 <아바타>의 장면 같은 오래된 용 나무의 군락들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뿌리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고 밑동이 굵은 나무의 이끼로 보아 오랜 세월 이 마을을 지켰을 모습에 자못 경건해지는 순간이다.
< 마을 어귀의 용나무 >
마을을 돌아 나오니 공원에 청룡 열차 같은 미끄럼틀이 설치되어 있다. 재미 삼아 남편이 미끄럼틀을 타면서 동심으로 돌아간 듯 해맑게 웃는다. 그러나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다시 길은 조그마한 사찰을 지나 동네 숲길로 걸어 가게 하는데 그 지점에 원폭 피해자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이 평화롭고 고요한 마을에도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인해 무고한 인명들이 희생된 슬픈 역사가 있었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 원폭 피해자 위령탑>
올레의 끝 지점은 구시노쓰(口之津)항에서 보였던 빨간 아치교 옆에 세워진 민속자료관에서 끝이 난다. 시작 지점까지 꽤 거리가 있는데, 다행히 민속자료관 관리인이 차로 데려다주어 쉽게 돌아올 수 있었다.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는 바다와 다랑이 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사는 곳은 달라도 사는 모습은 같다는 것을 체험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