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았던 하얀 눈길에 발자국 내기
이러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내가 유튜브를 시작한 건 어쩌면 억화감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대한 억울함. 그것을 만회하고자 시작한 유튜브였다. 남편이 반대했고 애 키우는 일에 나 집중하라고 말했다. 유튜브의 목적이 수익창출임에 방점이 찍혀있는 그에게는 내가 유튜브를 시작한다는 것은 안정된 생활을 서포트할 와이프와 아내로서의 자리에 대한 기회비용을 포함,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 헛짓 일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작한 @어쩌다piano 였다.
수익창출이 목표가 아니라지만 힘들게 만든 영상에 조회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상심이 될 것도 알았고, 그러다 곧 지치리라는 것도 알았다. 홧김에 집을 나가서는 반나절도 못돼 춥고 배고프면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집으로 기어들어오고 싶어지는 가출 청소년의 마음처럼. 그래서 초반에 셀프 동기 부여 영상 (빼박 시추에이션 만들기) 도 찍어놨다. 그런데 이 삽질이 내 인생에 생각지도 못한 변화들을 안겨줄지는 미처 몰랐었다.
어차피 세상엔 날고 기는 피아니스트가 너무 널렸다. 유튜브란 생태계는 과거의 거장들까지 모두 소환해내 안 그래도 피아노를 쳐야 하는 이유를 읽어버린 내게 피아노를 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수없이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야만 했고 그렇기에 입에 쓴 약을 삼키듯 스스로에 대한 쪽팔림 민망함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유튜브를 시작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미꽃들 중에 어린 왕자에게 특별한 장미가 존재했던 것처럼, 수없이 반복되어 들려지는 음악이지만 누군가에게 어린 왕자의 장미꽃과 같은 의미가 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사연이 담긴 곡을 그 누군가를 위해 연주한다면 그 누군가에게 향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받기로 했다.
Peter Kim이라는 분이 모차르트 소나타 12번 2악장을 듣고 싶다고 댓글에 남겨주셨다. 중고 피아노를 사러 다니던 십여 년 전 샵 셀러가 피아노 노리를 들려주겠다고 쳐 준 곡에 마음이 빼앗겨 이 곡을 알게 되었노라고…
모차르트 소나타 12번. 나에게도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곡이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나는 늘 우울했다. 잘하고 싶었는데 잘하지 못했고, 인생에 큰 꿈을 안고 영국 유학을 시작하고는 그 꿈이 다 깨어지고 흩어져 그 파편에 찔려 많이도 아파했다. 그럼에도 나의 선생님 Hamish Milne에 대한 기억은 내게 늘 어린아이가 끝내 버리지 못하고 늘 안고 자는 너덜너덜해진 담요와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RAM에서 제자로 들어가기 가장 힘든 선생님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국제 콩쿠르 우승자들을 포함해 날고 기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인 혼혈아로 하버드 물리학과에 입학허가를 받고도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Hamish를 찾아온 엄친딸도 포함해서. 선생님이 나를 제자로 받은 건 아무래도 실수였던 것 같다.
처음 Hamish 선생님에게 트라이얼 랫슨을 받았을 때 선생님은 나를 흡수력이 빠른, 가능성 많은 학생으로 여기셨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나의 대한 첫인상은 판단 미스로 판명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학교생활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한 번도 나를 질타하지 않으셨다. 못난 자식을 나무라지 않고 끝까지 인내해주는 아버지와 같이. 그렇게 나는 늘 못난 학생이었지만 선생님과의 랫슨은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는 내게 연주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 소리를, 그 제스처를, 그 표정을, 오래된 스타인웨이의 나무 냄새를, 창살로 들어오는 햇살로 뿌옇게 떠다니던 먼지의 움직임을, 그가 어리바리한 나에게 웃으며 들려주었던 모차르트 선율을 기억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모차르트 소나타 12번이다.
모든 곡은 사람마다 만나는 지점에서 각기 다른 색체와 향기와 기억을 갖는다. 내가 연주한 모차르트 소나타 12번 2악장은 다른 누군가의 기억의 조각과 섞여 새로운 화학반응을 일으켰고, Peter Kim 이 남긴 댓글로 나는 그 화학반응의 실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또 다른 연쇄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감정의 전이.
이런 댓글을 읽고 감동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렇게 답글을 남겼다.
Peter님께서 좋아해 주시니 제가 너무 기쁘네요. 제가 신청곡을 받고 연주해 드리고자 함이 이렇게 사연에 담긴 곡이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램때문이었는데 그 기쁨을 함께 공유하게 되어 너무 좋네요~ 특별한 기억이 되어 피아노 치실 때마다 미소 지으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어쩌다piano 하나의 유튜브 영상에 이렇게 큰 애착이 생길 수 있구나 오늘 알았습니다. 큰 선물 소중히 간직할게요. 명화님은 많은 분들이 보고 듣고 공유해야 할 정말 멋진 아티스트이십니다. 늘 응원할게요!
내가 이렇게 감동을 먹으려고 연주 영상을 올린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누군가 내 가는 길을 지지하지 않는다 할지라고, 나의 삽질이 돈으로 환산되는 값어치를 만들어내지 못할지라도 사람은 떡(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영혼의 감동과 위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나의 수고로움에 스스로 토닥토닥해주는 순간이었다.
나는 음악을 매개로 이렇게 연결되는 순간들이 바닷가의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예쁜 조개를 찾아 보물인 듯 간직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어른이 되었고 값으로 치환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잊은 지 오래였는데, 그만둔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면서 오묘한 빛깔을 내는 조개를 찾는일에 다시금 기쁨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