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의 역사 1

자폭의 길은 꽃 길로 덮여있었다

by 사jang


꿈이 없는 청춘은 아프다 -웨이 슈잉


꿈이 뭐예요? 라는 질문. 유년기부터 시작되어 성인이 되도록 끈질기게 따라붙는 협박 질문. 꿈이 없으면 찐따고, 꿈이 대단할수록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세뇌화 과정을 착실히 거쳐온 나로서는 꿈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게 컸다. 그야말로 난 꿈이 있어 아픈 청춘이었다. 어쩌면 꿈이 있든 없든 청춘은 아픈 거라고 하버드 새벽 4시 반을 외치는 웨이슈잉에게 반박을 해보더라도 억울한 건 매 한 가지다. 꿈에 대한 집착은 20대엔 핑크 빛으로 빛났고, 30 대엔 푸르스름한 빛으로, 40 대엔 잿빛으로 변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꿈은 자의 반, 타의 반이 아닌 자의 100프로로 드롭시킨 지 오래. 어려서부터 전공을 했던지라 이 길로 쭉 가야 하는 줄 알았다. 한우물을 파야 한다는 구식 프로그램이 깔려있는 나로서는 이건 아닌데,, 나는 진짜 피아노랑 안 맞는데,, 라는 마음의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황금 같은 20대를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결국 중도탈락. 스스로 트랙에서 떨어져 나왔다. 난 죽어도 피아노는 다시는 안 치겠다는 선언과 함께.

세상이 날 도와주지 않는 거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자위와 함께. 당시 돌이 채 안된 둘째 아이는 중이염으로 심하게 아픈 상태였고, 서울대 병원에서는 항생제를 너무 과다 복용해 더 이상 손을 못 쓰는 상황이라 자연 치유되지 않으면 귀를 뚫어야 한다고 말했고, 아이가 아픈 이유는 엄마가 아이를 직접 키우지 않아서 그렇다는 결론이 난 상태였다. 당시 나는 출산 후 3개월 만에 다시 시작된 박사 준비로 온 몸이 만신창이였고, 아이가 아픈 것도 내 책임 같았다. 여자는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가장 큰 일이라는 친정엄마의 말씀에 미련 없이 때려치운 피아노였다. 그렇게 20년 인생을 갈아 넣은 꿈은 허망하기 짝이 없이 버려졌고, 난 좋은 엄마가 되기로 했다. 여자로서 행복이라는 게 남편에게 사랑받고, 아이들 이쁘게 잘 키우면 되는 거라는 실체 없는 명제를 따라.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나는 엄마였고, 나의 꿈 따위는 다시 고개를 쳐들기엔 상당히 눈치가 보였다. 아이들을 키우는데 도움받을 손길은 없었다. 꿈이라는 거창한 목표는 내게 사치품이었고, 나는 대신 남몰래 꿈이라는 이름을 옷깆에 숨기고 삽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삽질의 역사는 파란만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왔다. 남몰래 꿈꿔온 꿈은 입 밖으로 말하기 늘 부끄러웠지만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그 이름은 빠숀 디쟈~이너.


나의 로망은 알렉산더 맥퀸, 존 갈리아노, 스텔라 매카트니.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라면 모두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왠지 나는 패션을 위해 태어난 사람 일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착란의 상태를 유지하며 (다행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다) 참 열심히 삽질을 했다. 패션 디자인의 삽질의 역사는 사실 피아노를 그만두기 오래전부터, 나의 20대부터 꾸물대던 것이었다. 유학시절 학교에 적응 못해 힘들어하던 때에도, 나는 미싱을 한 대 사서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서 보내 주신 옷을 다 띁어 해체한 후 요즘 말하는 빈티지를 만들었다. 내 눈에는 그 옷들이 아방가르드한 꼼 데 가르송처럼 멋져 보였다. 나에겐 잘 재단된 옷을 과감히 잘라버리는 대담함이 있었고, 올리 풀린 채로 마감을 하지 않은 상태를 멋으로 여길수 있는 빠숀 안목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십 년 가까이 내 옷을 만들어 입고, 아이들의 옷을 지어 입혔다. 21세기를 살면서 가내 수공업을 한 케이스다. 아이들을 키우며 지친 일상은 짬을 내 동내 문 시장에서 옷감을 사 와 밤새 패턴을 그리고, 재봉질을 하며 옷을 만드는 것으로 위안받았다. 나는 언젠가 위대한 디쟈~이너가 될 거라는 차마 말로는 발설 못하는 꿈을 꾸면서.


삽질은 언제나 우연을 만나게 된다. 놀이터에서 만난 인연은 나의 허파에 제대로 바람을 넣어주었다. 그녀의 넉살 좋은 딸 때문에 나와 인연을 맺게 된 J는 모전여전 (부전자전의 Female 버전)을 증명하듯 슈퍼 나이스 걸이었다. 그녀가 나의 디자인 능력을 칭찬한 건 그녀의 넉살 좋은 너그러움 때문이었음을 나는 그때 왜 몰랐을까. 그녀는 나처럼 취미로 패션을 하다가 사업으로 성공한 케이스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친절하게도 그들의 인스타 계정들을 나에게 보여주였다. 나는 그때 인스타라는 소셜 네트워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날로 바로 내 핸드폰엔 인스타 앱이 깔린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세상은 나만 몰랐지, 바야흐로 패션 춘추전국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블로그나 인스타로 사업에 성공하고 성장해 백화점 팝업, 그다음엔 매장을 여는 수순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J는 내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성공할 수 있다고, 허파가 터지도록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고, 나의 자신감 상승은 두려움을 망각하는 무모함으로 발현되었다. 맨땅에 헤딩하기.


옷을 제작하기 위해 생산 공장을 찾아야 했다. 어디다 연락을 해야 할지 알 턱이 없었다. 무작정 동대문 봉제공장 사이트를 찾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전화를 돌리기를 반나절. 소량 생산은 안 해 준단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한 공장에 찾아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무엇보다 사장님의 말투가 상업적이지 않고 쌩 하지 않아 무작정 인천에 있는 공장에 찾아갔다. 내가 거기서 누굴 만났는지 아는가? 글쎄, 공장 사장님이 빠숀 디쟈~이너 였다. 그것도 티브이에도 나온. 방송에서 서바이벌 콘테스트 탑디자이너 우승자로 1억 상금까지 받았다는 분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분이 쎄인트 마틴 출신이라는 거다. 더 더 놀라운 건 그분이 알렉산더 맥퀸에서 일했었다는 것. 더 더 더 놀라운 건 알렉산더 맥퀸에서 해골 디자인을 본인이 했다는 믿지 못할 스토리까지 전해 들었다. 이미 게임 끝. 내가 뭘 더 바라겠는가. 임가공비가 비싸건 말건 난 무조건 이 분이랑 고~ 한다 결정은 내려졌다. 나는 그렇게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잡았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세인트마틴. 내가 그토록 선망해 가슴 떨려했던 알렉산더 맥퀸. 잘 나가는 신진 디지이너 타이틀. 나의 로망 삼종세트를 다 충족시킨 공장 사장님인데 내가 뭘 더 바라겠는가. 게다가 인품까지 좋으신 사장님은 내 디자인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디자이너 브랜드로 가도 충분하다고. 그 말인즉은 시즌별로 디자인을 생산해내야 하며, 사이트도 만들어야 하며, 룩북도 찍어야 하며, 마케팅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소품종 소량생산은 물 건너갔다는 뜻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받아 살아온 나로서는 그것이 현실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묻고 따지지도 않고 공장 사장님과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옷 몇 개 만들어보겠다고 찾아와서는 공장을 통으로 돌리는 계약을 선뜻 맺은 것이었다. 운명의 신은 언제나 그렇듯.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음을 숨긴 채 나를 암흙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작이 반이라고 누가 그런 희망 찬 말을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