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되는 사람
나이 들어갈수록 남성이 여성화하거나 여성이 남성화하는 현상은 신체나 호르몬 변화의 의미라고 한다. 요즘 대체로 그런 현상이 뚜렷하다. 생물학적 변화뿐 아니라 전통적인 성 역할이 바뀌는 과정인가?.
암튼 우리 집도 아주 많이 변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유별난 남편 덕에,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일시적인 전쟁터로 바뀌었다. 널브러진 물건들은 후다닥 제자리로 치우고, 각을 맞추어야 했으니 군대도 이런 군대도 없었다.
현관문 들어설 때 표정도 살펴야 했다. 마치 상급자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웃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한때는 살벌한 얼음판 위에 놓인 것처럼 불안할 때가 많았다.
남들은 부지런하고 깔끔하니 얼마나 좋을까 해도 그건 영혼 없는 남의 말일뿐이었다. 마치 지옥처럼 느껴졌다. 작은 물건 하나도 꼭 제자리에 두어야 탈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상황들이 시작점이 언제인지 느낄 겨를 없이 어느새 바뀌어 버렸다. 주도권이 차츰 바뀌고 있다. 바뀐다는 표현보다 슬쩍 져준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마누라가 이젠 만만치 않다고 싶었는지, 아니면 시끄러워지겠다 싶어서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늘어놓는 나와 제때 못 치우는 나, 미루는 나를 돌아보면 예전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한 번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서 현관문 열더니, “백수(나를 지칭)는 오늘 뭐 하고 놀았어?”. 아무리 농담을 즐겨서 웃고 넘긴 말이지만, 처음엔 백수라는 단어가 퍽 거슬렸었다. 놀고먹는 사람으로? 아무튼 그랬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되는 사람인 걸 모르시나 봐.”
“나 자체가 돈이여.”
“어때, 제네시스 풀옵션 오케이? 견적 넣을까?”
눈을 동그랗게 굴려 가며 큰소리치고 나니, 나이 들어 힘없어지고 순해진 남편이 정말로 믿는다. 그 후 백수라고 부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제는 백수라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차라리 자유로운 영혼, 백수였으면 좋겠다.
나이 들면서 고집스럽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잘하고 웃음이 많아진 남편이 오늘따라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해. 매일 그렇게 많이 웃는 날만 이어지면 좋겠다.
내 차는 지저분해서 못 보겠다고 매번 투덜거리면서도, 백수가 놀고 있는 사이에 엔진 오일 갈아서 대기시켜 놓았다. 아주 가끔 더 많이 참아주고, 져주는 남편. 이렇게 고마울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