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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보낸 일주일

by 마리혜

이른 아침 눈뜨자마자 창문을 열어젖히니 주위의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내 시선과 같은 위치에 서 있다. 거기다가 아파트 옆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경계로 풍성하게 우거진 숲은 아래에 머물러 있어서 창문 가득 담기는 울창한 숲만 봐도 상쾌한 느낌이 든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들은 미니어처로 둘러싸인 것처럼 넓게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아침의 고요를, 위에서 바라보며 평정하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산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곳곳의 크고 작은 풍경들이 신비한 조화를 이루니 마음의 크기가 한 뼘 커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아들과 보내는 울산의 아침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도 오늘이 휴가 마지막 날이다.

아들은 본가에 오면 아빠와 엄마 셋이서 산책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바쁜 틈에도 잠시 짬 내서 오면 그마저도 셋의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울산에 오면 아들과 함께 계획했던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도착하고 두 번째 날!

전날 조카 결혼식 뒤풀이에 받아 마신 몇 잔 술이 뒷날 아침까지 영향을 미친 건가. 받지 않아서 못 마시는 술이 어쩐지 술술 들어가더라 했다. 결국 소주 석 잔에 일을 내고 말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내려서다 슬라이딩! 호되게 찧은 것은 엉덩이인데 기억도 없는 새끼발가락은 왜 아프며 새끼발가락을 잇는 발바닥을 왜 아픈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색도 못하고 있는데, 아들은 퇴근하고 돌아오면, 미리 봐둔 곳에서 산책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맛있는 거 먹자고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출근했다.


엄마 오기 전에 미리 화장실 청소 깔끔하게 했으니 손대지 말라고 엄포도 놓는다. 시치미 뚝 떼고 대답은 했지만, 그래도 제아무리 깔끔 떨어도 엄마 눈에는 손 갈 일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나저나 점점 아파지는 발바닥이 신경이 쓰였다.


아픈 발바닥으로 뒤뚱거리면서 그럭저럭 하루 종일 쉬엄쉬엄 청소를 끝냈다. 그런데 잔뜩 밀린 책 읽기와 블로그 포스팅은 손에 안 잡힌다. 아파트 단지 내 옆으로 울창한 숲 가운데 누렇게 드리운 작은 텃밭에만 눈길이 자꾸 간다. 모자를 꾹 눌러쓴 아주머니와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잠시 오늘과 같은 일들이, 늘 하던 책과 글을 잠시 멈추게 했다.


문득 생각났다. 이제는 글을 쓰고 싶다고 마음먹을 때까지 나의 일상은 지금처럼 늘 그랬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에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독립을 시키는 동안 그것이 최대의 행복이라 여겼었다. 꿈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후회는 없지만..


저녁에 퇴근한 아들에게 들켜 온갖 걱정을 꼼짝없이 다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싫지 않았다. 산책하려는 계획도 맛집 투어도 대충 집밥으로 해결했다. 가끔 늘 씩씩한 엄마로 여기는 불만 아닌 불만이 있었다. 나도 아이들한테 가끔은 씩씩한 엄마가 아닌 챙겨주고 싶은 연약한 엄마가 되고 싶은데 말이다.


세 번째 되는 날은 제대로 호강했다. 아파도 미련스럽게 보낸 전날을 잊고, 아침부터 일찌감치 서둘러 정형외과에 들러 발 사진을 찍었다.


“뼈가 부러졌습니다. 조금만 어긋났으면 큰 병원 가서 수술해야 하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말도 약간의 순화시켜서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골절이라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같은 뜻이긴 해도 퉁명스럽게 내뱉은 부러졌다는 말에 먼저 놀래버렸다. 환자는 병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 결과에 대한 공포심을 이미 가지고 있으니 의사의 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본가에 돌아가서 나머지 치료받기로 하고, 반 깁스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아들은 엄마와 함께 하기로 한 계획한 것이 거의 수포로 돌아갔지만, 불국사 밀면과 카페 투어로 수정했다. 최대한 걷지 않고 갈 수 있는 점심 식사할 곳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폭풍 검색했다.

불국사 밀면!

경주시 불국장터길에 위치한 식당은 밖에서 보는 분위기와는 달리 10여 미터의 긴 줄과 후한 인심과 맛은 그 집만의 명성을 충분히 알만 했다.


경주 테라로사!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 본점이 있는 테라로사를 경주에서 만났다. 아들과 손잡고 천천히 들어서며 고향의 풍미를 느낄 수는 없었어도 경주의 특징을 살린 우아한 멋을 한껏 뽐낸 테라로사 카페에서 오후를 보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들은 엄마라는 느낌보다 친구같이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편이라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결혼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의 결혼관에 대해서 자유로운 대화를 하게 되니 혼기가 찬 아들이지만 아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기다려준다.


혼자 생활하며 먹는 것이 늘 걱정인 엄마였다가 며칠 동안이지만, 따라다니면서 조심하라는 아들의 잔소리가 무척 행복했다. 손이 많이 가는 꼬마였을 때 손잡고 다닐 때처럼, 엄마가 넘어질까 걱정돼서 하루 종일 손을 꼭 잡고 다녀준 아들이 무척 고맙고 행복했다.


아들 집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부터 발바닥 골절로 인해 거의 꼼짝없이 갇혀 지냈지만, 아들에게 보호받는 일주일이 무척 행복했다. 아들에게는 엄마가 다치는 일이 걱정되고 폐 끼치는 일이니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아들과 손잡고 다니는 것은 언제나 그러고 싶다.


내일 아침에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고층 아파트와 옆의 숲 대신, 빠르게 질주하는 차들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분주하게 출근준비하는 아들의 모습이 그려지겠지. 그새 또 아들이 보고 싶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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