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상 명단에서 내가 찾은 이름

자극 없는 서사에도 이유는 있었다

by 이슈피커

며칠 전, 에미상 후보작 명단을 훑다가 뜻밖의 이름을 발견했다.

‘오징어 게임’이 아니라 ‘파친코’였다.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넷플릭스 시리즈 대신, 애플TV+의 조용한 서사가 더 높이 평가받은 순간이었다.

드라마를 꾸준히 챙겨보는 입장에서 이 선택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장면들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파친코2-1.jpg 사진=애플TV

‘파친코’ 시즌 2는 지난해 여름 공개됐다.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일본 제국주의 아래 조선을 떠난 한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가족과 정체성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시즌 1보다 확장된 시공간 속에서, 그 이야기는 훨씬 더 조용하고 깊게 파고들었다.


내가 특히 인상 깊게 본 건 선자라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의 선자와 노년의 선자를 김민하와 윤여정이 각각 연기하는데, 삶의 궤적이 전혀 다르면서도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버텨야 했던 시간,

손자 솔로몬과 대화하며 기억을 더듬는 노년의 시간.

같은 사람이지만 시대와 책임이 바뀌며 또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인상을 남겼다.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5화였다.

나가사키 원폭 직전의 긴장감을 흑백 화면과 날짜 삽입으로 표현했는데, 전투 장면 하나 없이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방식이 놀라웠다.

화면이 조용한 만큼 감정이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마 이 회차 하나만으로도 촬영상 후보 지명은 충분했을 것이다.

파친코2-4.jpg 사진=애플TV
파친코2-3.jpg 사진=애플TV

시즌 2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감정은 상실이다.

남편 이삭이 사라지고, 고한수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선자와 등을 지게 된다.

아들 모자수는 야쿠자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솔로몬은 가족과 현실 사이에서 균열을 겪는다.

‘살아남는다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그런데 이 잔잔한 슬픔이야말로 ‘파친코’의 힘인 것 같다.

모두가 소리를 지르고 폭발하는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말없이 눈을 마주보는 장면 하나가 더 큰 울림을 준다.

시즌 1보다 시즌 2에서 감정의 층위가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것이 이번 에미상 후보 지명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1989년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다소 길게 느껴졌고,

선자 역의 두 배우 간 이미지 차이가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몇몇 미국 배우들의 연기 톤이 튀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각 인물의 사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이야기답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오징어 게임’이 떨어지고 ‘파친코’가 올랐다는 결과를 처음엔 이상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극보다는 내면의 힘으로 밀어붙인 이 작품이

세상의 빠른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는 걸

조용히 증명해낸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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