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에서 우리는 만난다

극장에서 다시 만난 이름들

by 이슈피커
1.jpg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어느 여름 저녁이었다. 덥지도, 그렇다고 시원하지도 않은 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스마트폰 화면을 힐끔거리다 우연히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보게 됐다. 안효섭과 이민호, 그리고 불타는 도시. 낯설지 않은 제목. ‘전지적 독자 시점’.


낯익은 이름이었다. 몇 해 전이었다. 밤늦게까지 웹소설을 끊지 못하고 읽던 시절이. 회차가 끝날 때마다 화면을 넘기며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나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막연한 상상이었는데, 지금 그 장면들이 내 눈앞 현실로 떠오르고 있었다.


최근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개봉 첫날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예매 수치만으로도 다른 영화들을 압도했다. 마블의 신작도, 여름 블록버스터도 잠시 뒤로 밀려났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던 그 서사가, 극장 스크린 위에 다시 살아 숨 쉬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웹소설이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연재됐고 그 시간 동안 꾸준히 독자들의 호흡을 사로잡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재앙, 그리고 단 하나의 독자. 모두가 읽지 못한 세계를 유일하게 읽은 자의 시점으로 세상을 다시 쓰는 이야기.

2.png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안효섭은 바로 그 ‘김독자’가 됐다. 이민호는 이야기 속 또 다른 중심, ‘유중혁’으로 등장한다. 멸망한 세계에서 생존을 걸고 서로를 경계하고, 또 믿는다.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밤새 글자를 따라가며 상상했던 바로 그 인물들이었다.


채수빈, 신승호, 나나, 지수, 권은성. 익숙한 얼굴들이 각기 다른 운명을 안고 이 세계로 들어왔다. 어쩌면 원작에서 그토록 매력 있던 인물들이, 이제는 배우의 숨결을 입고 현실 위에 서게 된 것이다. 방대한 세계관은 어떻게 스크린에 옮겨졌을까. 기대와 우려는 늘 함께였다. 웹툰도, 드라마도, 영화도. 원작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래도 기대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했다. 웹소설과 웹툰, 익숙한 이야기가 극장으로 옮겨질 때마다 한 가지 바람이 생긴다. ‘내가 상상했던 장면, 그대로 살아나면 좋겠다.’ 그 바람이 관객을 예매 버튼으로 이끄는 것이다.

현재 흥행을 이끌고 있는 'F1 더 무비', ‘킹 오브 킹스’, ‘노이즈’, ‘코난’, ‘쥬라기 월드’ 같은 해외 대작들 사이에서, 국산 영화가 선전하기란 쉽지 않다. 그 속에서 '전지적 독자 시점'은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작품이자,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선택지다.

3.jpg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김병우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 “현실과 판타지가 맞닿은 지점”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는 비현실적인 순간들. 거기서 오는 전율. 그건 소설을 읽을 때나 영화로 볼 때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또 다른 고민도 털어놨다. “영화는 회차가 없다.” 웹소설은 이어보면 되지만, 영화는 한 번에 끝나야 한다.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 수백 회의 이야기를 녹여내야 하는 일. 그건 구조적 설계의 문제이자, 정서적 몰입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장면은 과감히 잘라냈고 어떤 부분은 새롭게 짰다고 했다. 독자에게 익숙한 장면을 유지하면서도, 관객에게 낯설지 않게 풀어내야 했기 때문이란다. 그 사이에서 감독은 고민했다. “무언가 새로운 재미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극장의 불이 꺼지고, 첫 장면이 시작될 때, 마음은 다시 독자가 된다.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다음 장면을 궁금해하는 기이한 감정. 익숙한 서사를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만날 때 느끼는 그 묘한 기대감.


어쩌면 이 영화는 원작을 알고 있는 사람과, 처음 만나는 사람 모두를 위한 작품일 것이다. 현실의 끝과 상상의 경계. 낯선 세계를 건너는 길 위에서, 우리는 누구나 김독자가 된다. 혼자였던 독자가, 함께 그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된 것처럼.

4.jpg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여름밤, 다시 스크린 앞으로 가야겠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던 그때처럼. 세상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이번엔 내 눈앞에서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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