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사한 그녀'
개봉 당시 큰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보는 사람들이 “이거 생각보다 훨씬 재밌다”고 말하는 영화가 있다. 극장에서 조용히 사라졌지만 입소문을 타고 재발견된 작품, 바로 지난 2023년 개봉한 엄정화 주연의 범죄 오락 영화 '화사한 그녀'다. 단순한 사기극으로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긴장감과 웃음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작전의 짜릿한 손맛과 인간적인 감정이 한데 뒤섞여 이상하게 여운이 남는다.
서울 상위 1% 재벌들의 사교 파티 한복판, 반짝이는 다이아가 걸린 그 자리에서 한 여인이 미소 짓는다. 그녀의 이름은 지혜(엄정화).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작전꾼이다. 평범한 미소 뒤엔 정교한 계산이 숨어 있다. 손끝의 미세한 동작, 시선의 방향 하나까지 모두 계획이다. 이 한 장면만 봐도 화사한 그녀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지혜는 한때 잘나가던 베테랑 작전꾼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은퇴를 고민한다. 그런데 마지막 한 번만 더 하자는 유혹이 찾아온다. 문화재 밀매꾼의 저택 지하에 600억 원 상당의 금괴가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들은 것이다. 그곳에 접근하기 위해 그녀는 완벽한 작전 캐릭터를 만든다. 상대의 이상형을 분석하고 취향을 연구하며 목소리 톤까지 조정한다. 그 결과, 재벌 아들 완규(송새벽)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훔친다.
하지만 모든 게 순탄하진 않다. 완규의 아버지 박기형(손병호)은 냉정하고 의심 많은 인물이다. 친일파 출신의 문화재 브로커로, 아들마저 이용하며 부를 쌓아온 사람이다. 지혜는 이 가문에 숨은 비밀을 캐내며 점점 더 큰 위험 속으로 빠져든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유쾌함과 서스펜스의 균형이다. 엄정화가 맡은 지혜는 냉철하지만 어딘가 허술하다. 작전 중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터지면 순식간에 머리를 굴리고,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장면들은 짜릿함을 준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생활감 있는 유머가 관객의 긴장을 덜어준다.
지혜의 딸 주영(방민아)도 인상적이다. 현장에서 직접 뛰는 엄마 대신, 무전기로 지시를 내리며 작전을 돕는다. 엄마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다급히 상황을 수습하는 모습은 영화의 또 다른 중심축이다. 모녀가 서로 의지하고, 또 충돌하는 장면에서 생기는 감정선이 의외로 진하다.
송새벽의 연기는 말 그대로 예측 불가다. SNS 중독자이자 허세 가득한 순정남 완규는 현실에 있을 법한 어딘가 어수룩한 부자 아들이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면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묘한 반전으로 이어진다. 손병호, 박호산, 김재화 등 개성 있는 조연들도 각자의 색깔을 확실히 남긴다. 이들의 연기가 모여 극을 탄탄하게 만든다.
화사한 그녀의 진짜 재미는 후반부에 있다. 사기꾼 모녀는 점점 커지는 함정 속에서 예측 못한 인물들과 부딪히고, 결국에는 권력과 탐욕을 상징하는 집단을 통째로 속인다. 그 과정에서 숨겨진 금괴의 위치를 알아내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미술품 속 그림 하나, 안경 렌즈 하나까지 의미를 품고 있어 퍼즐처럼 맞춰지는 쾌감이 있다.
영화의 엔딩은 단순한 범죄극이 아닌, 세대를 잇는 부조리를 향한 복수극으로 완성된다. 사기꾼이지만 정의롭고, 거짓말이지만 시원한 결말이다.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다. 엄정화는 이 작품에서 원톱 배우의 힘을 다시 증명한다. 코믹 연기와 액션, 감정 연기를 자유롭게 오가며, 얼굴 하나만으로 긴장과 완급을 조절한다. 한 장면의 표정만 봐도 이야기가 이어진다.
화사한 그녀는 단순한 사기극이 아니다. 무너져가는 인간 관계 속에서도 끝까지 서로를 믿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OTT에서 다시 보면 놓쳤던 디테일이 새롭게 보인다. 극장에서는 조용히 지나갔지만, 지금 다시 본다면 “이걸 왜 몰랐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이건 정말,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국영화 띵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