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력질주’
트랙 위로 붉은 석양이 번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신호음이 울리기 전 찰나의 정적이 흐른다. 스파이크가 땅을 박차는 순간, 공기마저 갈라지는 소리가 터진다. 마치 바람을 쫓는 게 아니라 바람이 그를 따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심장을 두드리는 영화가 있다. 바로 9월 개봉한 ‘전력질주’다. 단 한 걸음의 차이, 0.02초의 기록을 향한 인간의 도전이 스크린 위를 전력으로 질주한다.
‘전력질주’는 달리기라는 단순한 스포츠 안에 인생의 굴곡과 선택을 담았다. 지금의 벽을 넘지 못한 남자와, 미래를 향해 첫발을 내딛는 청춘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속도로 교차한다. 누가 더 빠른지가 아니라, 누가 멈추지 않는가를 묻는 이야기다.
하석진이 연기한 구영은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남자”라 불렸던 스프린터다. 국내 100m 최고 기록 10.07초를 가지고 있지만,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기준인 10.05초에 단 0.02초가 모자라다. 그 미세한 차이가 그의 인생 전체를 흔든다. 부상과 이혼 위기, 은퇴 압박까지 몰려온 구영은 결국 집으로 돌아와 멈춘 듯 보인다. 그러나 매니저 준수(이순원)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스파이크를 묶는다. 이번에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싸우기 위해서다.
트랙 위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 그리고 달리기 직후 들이마시는 숨 하나하나가 이 영화의 긴장감이다. 관객은 마치 함께 스타팅 블록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고등학생 승열(이신영)이다. 운동에는 재능이 없지만, 육상부 지은(다현)의 훈련 장면을 본 순간 마음속 무언가가 움직인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된 달리기였지만, 점점 그에게는 인생의 방향이 된다. 유망주 근재(윤서빈)와 경쟁하며, 자신만의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한다. 승열의 이야기는 “아직 기록도, 목표도 없는 청춘”이 어떻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가를 보여준다.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영화는 세대 간의 러닝을 그린다. 한쪽은 기록을 쫓고, 다른 한쪽은 의미를 찾는다. 이 둘이 결국 만나 완성되는 결승선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9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하석진은 실제 선수처럼 체중을 감량하고 달리기 자세까지 새로 익혔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신영은 풋풋하면서도 진지한 눈빛으로 성장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다현은 달릴 때 가장 행복한 러너 지은으로 등장해 청춘의 맑은 에너지를 더했다. 이순원은 묵직한 조력자 준수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야기의 균형을 잡는다. 신예 윤서빈은 첫 장편 도전임에도 생생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이 작품은 허구의 수치를 만든 게 아니다. 실제 한국 남자 100m 공식 기록인 10초 07초에서 출발했다. 세계 무대 진출 기준은 10초 05초, 단 0.02초의 차이다. 이 미세한 간극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선수 인생의 무게다. 감독 이승훈은 “이 영화는 결과보다 심장 박동을 되찾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영화는 빠른 속도보다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실패와 후회, 그럼에도 다시 뛰는 용기까지 모두 담았다.
‘전력질주’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ACFM에서 해외 판권이 먼저 팔리며 화제를 모았다. 미국 필름마켓에서도 판매가 성사됐고, 대만에서는 35~40개 극장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아시아 전역에서 주목받는 배우 이신영의 존재감과 작품의 진정성이 결합하며 기대감이 높아졌다.
국내에서도 조용히 입소문을 타고 있다. 누적 관객수 1만 7,551명, 다음 영화 기준 평점 5.5점을 기록했다. 숫자는 크지 않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내 이야기 같다”, “달리기보다 인생 영화”, "눈물 난다", "초심 잃었을 때 보면 좋을 듯"이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전력질주’는 단순한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 트랙 위의 땀방울이 결국 인생의 은유로 이어진다. 구영은 기록을 넘어 자기 자신을 이기고, 승열은 달리기를 통해 세상과 마주선다. 두 사람의 전력질주는 결국 ‘누가 더 빠른가’가 아니라 ‘누가 멈추지 않았는가’를 말한다. 스크린을 가르는 숨소리, 스타팅 블록을 박차는 발의 울림 속에서 관객은 자신만의 출발선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