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볼 만한 한국 영화 추천
11월은 흔히 비수기로 불리지만, 올해는 다르다. 대형 블록버스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들이 극장에 줄지어 들어오고 있다. 이야기의 힘으로 관객을 붙잡는 영화들, 바로 이런 시기에 진짜 ‘극장에 가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지금 소개할 네 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흔든다.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세계의 주인’이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개봉 4주 차에도 여전히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어린 시절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온 윤가은 감독은 이번엔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복잡한 감정의 세계를 포착했다. 학교 안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는 소녀 ‘주인’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균열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한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 정보 없이 봤을 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개봉과 동시에 ‘노 스포일러 챌린지’가 확산됐고, 관람 후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연상호 감독과 박정민이 직접 응원을 보냈을 정도로 영화계에서도 입소문이 거세다. 작은 예산으로도 진심이 담긴 작품은 충분히 관객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관람평 : 알고 보면 늦는다, 아무것도 모를 때 가장 빛나는 영화
별점 : 9.0 / 10
극장 개봉일 : 10월 22일
한지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맨홀’은 사춘기 소년의 내면을 밀도 있게 따라간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숨겨진 폭력의 기억, 그리고 이주노동자 사건으로 이어지는 비극은 한 인물의 혼란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동시에 비춘다. 소설이 1인칭 시점으로 내면을 직접 그려냈다면, 영화는 차분히 거리를 두고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신예 김준호는 주인공 선오의 불안과 분노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단순한 도덕 문제로 그리지 않고,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낸 복잡한 감정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다. 영화는 선오의 눈을 통해 인간의 선악이 얼마나 쉽게 뒤바뀔 수 있는지를 묻는다.
관람평 : 죄책감과 분노 사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마음의 구멍
별점 : 8.2 / 10
극장 개봉일 : 11월 19일
11월 5일 개봉한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는 한국과 베트남의 첫 합작영화다. 모홍진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베트남 국민 배우 홍 다오와 젊은 스타 뚜안 쩐이 주연을 맡았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를 모시고 한국에 있는 형을 찾아가는 아들의 여정을 따뜻하게 그린다. 감정선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불러온다.
베트남 현지에서도 이 영화는 화제가 됐다. 이유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적인 감정의 결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환의 친구들로 출연한 코미디언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웃음이 영화의 리듬을 살리고, 환과 엄마의 마지막 장면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기교보다는 진심으로 쌓아 올린 감동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관람평 : 낯설지만 익숙한 가족 이야기, 떠올릴수록 따뜻하다
별점 : 7.5 / 10
극장 개봉일 : 11월 5일
11월 1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종이 울리는 순간’은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겨진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가리왕산 복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담았지만, 단순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욕망을 대비시키며 묵직한 울림을 준다.
감독은 이란의 소헤일리 코메일과 애니메이터 김주영이 공동 연출을 맡아 다큐에 예술적 감성을 입혔다. 산과 나무, 동물들이 마치 하나의 인물처럼 등장해 인간의 시선을 되돌아보게 한다. 정선 군수와 마을 주민의 솔직한 인터뷰는 현실의 온도를 그대로 전한다. 환경 다큐라기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담은 한 편의 서사로 다가온다.
관람평 : 스크린에서 들려오는 나무의 목소리, 조용하지만 강렬하다
별점 : 9.3 / 10
극장 개봉일 : 11월 12일
11월 극장가의 공통점은 화려한 액션이나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다. 그 대신 현실과 감정을 세밀하게 다룬 작품들이 관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스포트라이트 대신 조용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영화들이 오히려 오래 남는다. 올가을, 따뜻한 조명 아래 극장에서 이 네 편의 영화를 만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