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면 생각나는 한 장면

다시, 벽난로 앞 엘리오를 만날 시간

by 이슈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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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자 한낮의 여름 냄새가 들이쳤다. 이탈리아의 것이라기엔 너무 끈적하고 그렇다고 이국적이라 말하기엔 익숙한 그런 여름. 나는 순간 자전거 페달을 밟던 두 사람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햇빛을 등지고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말없이 나란히 달리던 그 여름의 소년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다시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극장 안은 조용했고 나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티모시 샬라메의 엘리오는 말없이 피아노를 치거나 책장을 넘기거나 낮잠을 자거나 그렇게 조용한 방식으로 마음을 키워나갔다. 영화는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여름은 실제보다 더 진하고 더 선명했다. 이탈리아의 햇살은 유리컵 속 살구처럼 빛났고 정원의 풀잎 하나, 나무 그림자 하나마저도 유화처럼 정교했다. 감정도 그만큼 또렷했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망설임, 한 걸음 다가설 때의 떨림, 무언가 끝나고 있다는 예감이 들 때의 조용한 고통. 그것들을 영화는 아주 천천히 아주 섬세하게 보여줬다.


다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벽난로 앞, 아무 말 없이 흐느끼는 엘리오의 얼굴. 몇 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그 안에는 다 말해지지 못한 마음들이 소용돌이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견뎌야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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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때로는 그 아름다움이 불편하다는 말도 나왔다. 엘리오의 부모는 지나치게 이해심이 깊고 친구는 실연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세상은 감정이 상처받지 않도록 모든 날을 다듬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설정이야말로 이 영화를 진짜 감정에 닿게 만든 건 아닐까.

현실은 올리버 쪽에 더 가까웠다. 그의 마지막 말처럼, "넌 운이 좋은 거야."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내어주며 사랑을 말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 감정을 접어 숨겨야 하는 세계 영화는 그 벽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충분히 느끼게 한다.


이동진 평론가가 이 영화를 “여름마다 꺼내보게 되는 감성의 영화”라 말한 것도 이해가 간다. 여름은 어떤 계절보다 생생하고, 그래서 어떤 감정보다 생생한 기억을 남긴다. 첫사랑이 여름에 시작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싱그러움과 열기 그리고 언젠가 끝나리라는 직감. 여름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키우고, 결국 떠나간다.


누구에게나 그런 여름이 있을 것이다.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는 여름.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은 누군가의 눈빛, 손끝에 닿았던 온기, 그냥 걷기만 해도 좋았던 거리. 그건 꼭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좋아했다는 감정만으로도, 그 계절은 충분히 찬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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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나는 또다시 엘리오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누군가의 발걸음, 오후의 정적, 그리고 흘러가는 감정들.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 그걸 느끼는 일이 어쩌면 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다만 하나의 여름이 지나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여름이 사랑이었다는 진실만이 남는다.


그게 이 영화가 다시 돌아오는 이유인 것 같다. 누군가는 아직 그 여름을 보내지 못했고, 누군가는 다시 만나야 할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나도 그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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