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그날을 건너 오늘에 서다

8월의 기억, 자유를 부른 목소리

by 이슈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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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늦여름 저녁, 신주쿠 극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한동안 멈춰섰다. 포스터 속 현빈의 얼굴, 그 뒤에 새겨진 단어 ‘하얼빈’. 일본에서 이 영화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낯선 듯, 그러나 묘하게 무게를 품은 표정으로 포스터를 바라보는 일본인 관객들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


이 영화는 1909년 가을로 되돌린다. 만주 하얼빈역, 총성과 함께 기록된 한 장면. 한국의 교과서 속에 굵게 박힌 사건이 스크린에서 다시 숨을 얻는다. 일본 공식 홈페이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의 서스펜스’라 적었다. 단순한 소개 문구였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과 안중근의 선택을 담아낸 문장이 일본 관객 앞에 놓였다는 사실 자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며칠 전 현빈이 직접 일본 시사회 무대에 올랐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일본 관객의 감상이 궁금하다.” 웃음이나 가벼운 농담은 없었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기록을 전하는 사람처럼, 무대 위의 말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또렷했다. 그날 극장 안은 숨을 고른 듯 고요했고, 질문들은 하나하나 진지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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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빈이 안중근을 연기한다는 소식은 일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통해 친숙해진 그의 얼굴이 이번에는 총을 든 의병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인터뷰에서 그는 “한류스타로서의 부담은 없었다. 다만 안중근 장군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너무나 컸다”고 했다. 화려한 인기보다 더 깊은 압박, 그러나 동시에 연기할 수 있었던 영광을 강조했다.


영화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한 이는 일본의 릴리 프랭키였다. 그는 배우이자 작가, 칼럼니스트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 관객에게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으로 친숙하다. 이번 작품에 대해 그는 “서로의 나라에서 상영된다는 사실 자체가 평화를 말해준다”고 했다. 대립되는 역할을 맡았지만, 상영의 의미에 더 무게를 두었다.


일본 내에서도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주목하는 이들이 있었다. 간토대지진 속 조선인 학살을 다룬 ‘후쿠다무라 사건’을 연출한 모리 다쓰야 감독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며 일본 관객에게 권했다. 단순한 시대극이 아니라, 배우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동지들과 다시 모여드는 과정, 두려움과 신념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 끝내 하얼빈역으로 향하는 발걸음. 총을 쥔 손보다 더 무거운 건 마음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 무게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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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우덕순을 연기한 박정민, 김상현의 조우진, 공부인의 전여빈. 함께 걷는 길은 갈등으로 흔들리기도 했지만, 끝내 하나의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 곁을 둘러싼 러시아 정보원, 청나라 관리들은 긴장을 배가시켰다. 역사의 뒤편에서 무대 장치를 돌리는 이들의 그림자가 스크린 위에서 살아났다.


한국에서 먼저 개봉했을 때, 이 영화는 약 491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설 연휴 극장을 찾은 가족들, 그리고 세대를 아우른 관람층이 함께했다. 해외 판권은 117개국에 팔렸다. 미국,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지금도 각국에서 상영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 개봉은 그 연장선에서, 그러나 또 다른 의미를 품는다.


평가는 갈렸다. 진중한 연출과 배우들의 집중력 있는 연기, 웅장한 미장센에는 찬사가 따랐다. 그러나 무겁고 느린 전개는 호불호를 불렀다. 휴먼 드라마를 중심에 놓은 서사는 누군가에게는 깊은 울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각색이 설득력 있게 구현됐다는 의견은 공통적이었다.

극장 안 어둠 속에서 나는 스크린에 새겨지는 얼굴들을 오래 바라봤다. 100여 년의 간극을 넘어, 낯선 땅에서 다시 전해지는 목소리. 영화를 나선 일본 관객들의 뒷모습은 담담했지만, 작은 귓속말과 고개 끄덕임 속에서 오래 남을 무언가를 전해 받은 듯 보였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았다. 신주쿠의 밤거리, 네온사인과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하얼빈’이라는 두 글자가 불빛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4.jpg 사진=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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