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작은 뉴스를 스크롤하다 눈이 멈췄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가 다음 달 개봉한다는 소식이었다. 동시에 베네치아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짧은 문장 하나로도 숨이 가빠졌다. 한국 영화가 다시 그 무대에 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박찬욱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벅차게 다가왔다.
베네치아. 이름만으로도 오래된 영화의 숨결이 전해지는 듯하다. 물의 도시에서 열리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카메라 플래시 속에 서서도 결국 마음 깊숙이 노리는 건 황금사자상.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이후 13년 만에 한국 영화가 그 경쟁에 오른다니, 오래된 갈증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사는 자연스레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했다. 이병헌이 해고당한 가장 만수 역을 맡았다. 손예진은 아내 미리로 함께한다. 회사원으로 살아가던 평범한 남자가 직장과 가족, 집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블랙코미디와 스릴러의 경계에서, 웃음과 비극을 동시에 예감하게 하는 서사. 나는 기사 속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가장 만들고 싶었던 작품.” 감독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어떤 무게가 설명되는 것 같았다.
티저 속 대사 한 줄은 강하게 꽂혔다.
“미국에선 해고를 도끼질 한다고 한다면서요. 한국에선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너 모가지야.”
짧고도 잔인한 농담 같은 말. 나는 순간적으로 직장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농담들을 떠올렸다. 웃어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모르는 말들. 현실은 늘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되짚는 기사 대목에서는 작은 회상처럼 내 마음도 뒤를 돌아봤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극장에서 입소문을 타던 시절, 좁은 좌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스크린 속 판문점을 따라 숨을 죽였던 기억. ‘올드보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충격과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감각. ‘아가씨’의 섬세하고도 파격적인 서사, ‘헤어질 결심’의 느릿하게 쌓이는 감정의 층. 그 작품들이 내 삶의 시간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게 문득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나는 그 시간에 나를 투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무대 뒤 이야기도 기사 속에 묻어 있었다. 첫 영화의 실패,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던 시간, 평론가로서의 활동. 그리고 다시 돌아와 세운 커리어. 화려한 수상 이력보다도, 나는 그 굴곡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어떻게든 영화 곁에 머물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박찬욱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포스터 속 장면 묘사도 눈에 들어왔다. 배롱나무 아래 모여 선 인물들. 일러스트로 그려졌다는 점이 의외였다. ‘만수’의 비장한 얼굴 옆에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이 대비된다니, 그 안에 이미 영화의 그림자가 스며 있는 듯했다. 화려한 배우들의 이름도 익숙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대비되는 표정 하나를 오래 떠올리게 됐다.
어쩌면 그것은 나에게도 질문이었다. ‘인생의 전환점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 영화 속 만수처럼 직장을 잃고, 가족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웃음을 가장한 절망 속에서도 몸부림칠 용기가 있을까.
아마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늘 그 질문을 던져왔던 것 같다. 폭력 속에서 인간을, 욕망 속에서 진실을,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그리고 이제, ‘어쩔 수가 없다’는 이름의 무게로 다시 우리 앞에 서려 한다.
나는 그 제목을 곱씹어 본다.
‘어쩔 수가 없다.’
체념의 말 같으면서도, 끝끝내 버티려는 선언 같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전환점 앞에서 그 말을 되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