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창문이 열릴 때, 욕망의 시장이 깨어난다

귀시, 욕망의 무게를 묻다

by 이슈피커
E.jpg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비 오는 저녁, 극장 앞에 우산을 접으며 서 있었다. 낯선 제목이 적힌 포스터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귀시’. 세 글자 안에 담긴 낯섦이 묘하게 당겼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곧 시작될 이야기의 기운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영화는 여우 창문이 열리는 순간 드러나는 은밀한 시장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가슴속 깊이 숨겨온 욕망을 사고팔 수 있었다. 돈, 외모, 성취, 심지어 단순한 호기심까지. 금지된 거래는 달콤하게 시작되지만 끝내 파멸로 향하는 길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욕망이 결국 저주가 되어 돌아오는 장면들은 차갑게 가슴을 조여왔다.


옴니버스처럼 나뉜 이야기들은 서로를 끌어당기듯 얽혀 흘러갔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인물들이 같은 시장에서 마주치듯 스쳐 지나가고, 관객은 그들의 집착을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 한 번 산 귀신은 돌려줄 수 없고, 눈을 마주쳐서도 안 된다는 규칙은 단순하지만 잔인했다. 결말은 어쩐지 예감할 수 있었지만, 과정은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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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기 감독은 오래 품어온 생각을 이번에 비로소 풀어냈다. 욕망을 귀신으로 형상화한 발상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 우리 안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서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베트남으로 이어졌다. 40도를 넘는 열기 속에서 찍었다는 장면들은 땀 냄새마저 스크린에 묻어나는 듯 선명했다. K-호러라는 이름이 더 이상 한 나라의 장르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출연진의 얼굴을 보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문채원은 외모에 집착하는 인물을 맡아 짧지만 강렬한 순간을 남겼다. 그는 배우로서 스스로와 겹치는 지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유재명은 집요한 순경으로 사건의 맥을 쫓으며 묵직한 무게를 얹었고, 서영희는 모성에 매달린 캐릭터로 관객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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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 그들은 각자의 경험을 조곤조곤 풀어냈다. 문채원은 “보여지는 직업을 가진 배우로서 쉽게 공감했다”고 했고, 유재명은 “의미를 이해하려 감독에게 계속 물었다”고 고백했다. 서영희는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며 학부모와 학생 모두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 순간 영화가 단순한 공포를 넘어 삶과 이어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얼굴들도 눈에 띄었다. 그룹 마마무의 솔라는 첫 영화로 귀시를 선택하며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학생 역의 배수민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베트남 현장에서 함께한 손주연은 외국 배우들과 영어로 소통한 기억을 들려주었고, 서지수는 첫 액션 연기에 도전해 긴장을 웃음으로 바꿔냈다. 차선우는 유재명 곁에서 후배 경찰로 자연스러운 호흡을 이어갔다.

W.jpg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영화 속 귀신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온 것은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욕망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가 벼랑 끝에 서는 인물들. 그 그림자가 어쩐지 우리 곁에도 겹쳐지는 듯했다.


귀시는 단순히 관객을 놀라게 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을 통해 우리 안의 어두운 틈을 바라보게 했다. 결말은 이미 정해진 듯 보여도,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음을 묻는다.


극장 문을 나서는데, 아직 빗방울이 흩어지고 있었다. 포스터 속 붉은 글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귀시’. 영화가 끝났는데도 그 제목은 오래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안의 시장이 방금 열렸다 닫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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