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에서 살아난 또 다른 장녹수

드라마·영화로 보는 역대 장녹수

by 이슈피커
1.jpg 사진=강한나 인스타그램

최근 '폭군의 셰프'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사극을 볼 때면 무겁고 화려한 궁중 의상, 긴 대사 속에 흘러나오는 인물의 이름이 귀에 오래 남는다. 특히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그 이름 장녹수.


노비로 태어났지만 춤과 노래, 그리고 눈빛 하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연산군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악녀로만 배웠지만, 화면 속 그녀는 조금 달랐다. 화려하게 빛나면서도 늘 위태로운 듯한, 불안과 욕망이 뒤섞인 표정. 그 순간, 이 인물은 단순한 교과서 속 이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람처럼 다가왔다.


장녹수는 세월마다 다른 얼굴로 다시 태어났다. 1980년대, 드라마 《설중매》에서 이미숙이 처음 입은 옷은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대사보다도 더 강렬한 시선이 화면을 지배했다. 이어 1990년대에 이르러 박지영이 연기한 드라마 《장녹수》는 한 여인의 생애를 오롯이 좇으며, 노비의 미천함과 권력의 정점이 교차하는 극적인 길을 보여줬다. 한때 어린 김민정이 아역으로 뛰놀던 장면은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또렷하게 남았다.

2.jpg 사진=KBS Archive

연산군의 곁에 붙은 그림자로만 보였던 장녹수는 배우마다 조금씩 다른 빛깔을 입었다. 유니가 노래 무대에서 내려와 사극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순간, 그 어색함마저도 독특한 매력이 되었다. 오수민이 보여준 《왕과 나》의 장녹수는 궁궐 내부의 싸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늘 권력의 불빛 속에서 불안하게 춤추는 그림자였다.


시간이 흘러 2010년대, 젊은 배우 전소민이 《인수대비》에서 보여준 장녹수는 조금 더 날카롭고도 풋풋했다.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아직 어린 듯한 표정은 신선했다. 그리고 이하늬의 장녹수. 국악을 전공한 배우답게 노래와 춤의 기운이 손끝까지 번져 나왔다. 연산군의 품 안에서 웃다가, 백성들의 손에 돌에 맞아 최후를 맞는 장면은 오래도록 잔상이 남았다. 같은 해 손은서는 차갑고 계산적인 얼굴을 보여주며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한 인물이 이렇게도 다양하게 바뀔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3.jpg 사진=씨네월드, 이글픽쳐스

영화 속 장녹수도 빼놓을 수 없다. ‘왕의 남자’에서 강성연이 보여준 얼굴은 화려함과 질투가 동시에 깃든 복잡한 모습이었다. 광대가 무대에서 자신을 흉내 내는 순간, 그녀의 표정에 번져가는 분노와 서러움은 보는 사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관객 천만이 넘는 흥행 속에서도 장녹수의 이름이 함께 회자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조금 색다른 길이 열렸다. 《폭군의 셰프》라는 퓨전 사극에서 강한나는 장녹수를 닮은 ‘강목주’라는 가상의 인물로 등장했다. 단아한 얼굴과 표독스러운 눈빛을 오가며 극을 이끌었다. 연희군 앞에서는 부드럽고 요염하다가도, 순간 다른 인물을 향해 독을 품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과거의 장녹수를 모티브 삼아 만들어진 캐릭터였지만, 화면 속 그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장녹수처럼 보였다.

4.jpg 사진=강한나 인스타그램

생각해 보면, 이 인물은 늘 비극과 매혹 사이에 서 있었다. 권력을 움켜쥐고도 끝내 버려져야 했던 여인. 사극은 장녹수를 악녀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야망을, 또 누군가는 사랑을, 혹은 시대의 희생을 담아냈다. 배우가 바뀔 때마다 장녹수는 다시 태어났고, 우리는 그 다양한 얼굴을 통해 역사를 조금씩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화면을 껐다가도 이름은 남았다. 장녹수. 한 시대의 권력자이자 동시에 가장 큰 희생자였던 사람. 그녀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드라마와 영화는 또 다른 얼굴로 다시 불러낼 것이다. 마치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가 같은 대사를 읊조리듯, 시대마다 다른 표정으로.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건 장녹수 그 자체가 아니라, 시대가 투영된 장녹수일지도 모른다. 그 다채로운 얼굴을 통해 우리는 권력과 욕망, 그리고 한 인간의 덧없음을 함께 비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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