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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길이 남을 최고의 사극 드라마들

사극이 남긴 다섯 장면, 오래된 울림

by 이슈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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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인데도 대사를 따라 부를 만큼 익숙하고, 여전히 마음을 붙잡는 힘이 있다. 특히 사극은 그런 경우가 많다. 낯선 시절의 언어와 복식, 웅장한 궁궐을 담아내면서도 이상하게 지금의 삶과 맞닿아 있는 듯한 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옛 시대를 다루지만, 결국은 권력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과 그 안에 숨은 연약함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2.jpg MBC 홈페이지

2009년 방영된 MBC ‘선덕여왕’은 그런 면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어린 시절 한쪽에서 밀려났던 덕만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단순한 승리담이 아니었다. 미실의 끝없는 책략 앞에서 흔들리고, 또 비담의 불온한 매력 속에서 갈등하던 여왕의 모습은 시대를 넘어 공감할 만한 서사였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여성 중심의 사극이라는 점에서, 덕만과 미실이 만들어낸 긴장감은 여전히 회자될 만하다.

3.jpg MBC 홈페이지

2012년의 ‘해를 품은 달’은 조금 달랐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완전히 가상의 궁중 로맨스였지만, 오히려 그 허구가 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인연이 정치적 음모로 인해 끊어지고,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들은 애절했다. 시청자들은 김수현의 눈빛에 몰입했고, 한가인의 절제된 감정선에 울컥했다.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OST를 들으면 금세 그때의 화면이 떠올랐다.

4.jpg tvN 홈페이지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돌리면, 2018년의 tvN ‘미스터 션샤인’이 있다.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주는 무게가 있었다. 조국을 떠나 미국 군인이 되어 돌아온 유진 초이의 시선은 이방인이면서도 누구보다 조선을 아프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고애신의 고집스러운 자존심, 구동매의 슬픈 외로움, 쿠도 히나의 서늘한 매력까지.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시대를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름 없는 의병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멜로드라마 이상의 울림을 남겼다.

5.jpg SBS 홈페이지

2015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SBS ‘육룡이 나르샤’는 사극의 또 다른 스케일을 보여줬다. 조선의 건국을 이끌어 간 여섯 인물의 이야기는 거대한 정치극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신념과 욕망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방원이 차갑게 성장해 가는 과정,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그 곁에서 묵묵히 싸워낸 인물들. 50부작이라는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대하서사시처럼 완성도가 높았다.

6.jpg 유튜브 'KBS Drama'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작품은 2012년 KBS2 ‘각시탈’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라는 점에서, 다른 사극들과는 결이 달랐다. 친일 경찰이었던 이강토가 형의 죽음을 계기로 항일 투사가 되어 가는 과정은 극적이었다. 일본 경찰 앞에서는 냉혹한 얼굴을, 가면을 쓴 순간에는 민중의 희망을 보여주는 이중적 존재. 그 긴장감은 매회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슈퍼히어로 서사를 시대극에 녹여낸 실험적 시도가, 지금도 신선하게 느껴진다.


이 다섯 편의 사극은 각기 다른 무게와 결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치밀하게 재현한 것도 있고, 허구를 과감하게 덧입힌 것도 있다. 그러나 공통된 매력은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지금의 우리를 비추는 힘’이다. 화려한 세트나 치밀한 고증을 넘어, 결국은 인물들의 흔들림과 선택이 시청자의 마음을 붙잡았다.


돌이켜 보면, 사극을 본다는 건 단순히 옛 시대를 구경하는 일이 아니었다. 시대가 달라도 결국 인간은 같은 두려움과 사랑,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는 걸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면, 마치 내 안에 켜켜이 쌓인 기억의 서랍을 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서랍 속에서 덕만이 웃고, 이훤이 울며, 유진 초이가 총을 들고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들을 조용히 다시 꺼내 보며, 지금의 시간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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