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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의 세계,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by 이슈피커
11.jpg 사진=넷플릭스

아침 지하철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였다. 두 사람이 ‘다 이루어질지니’를 기다린다며, 김은숙 작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단어 하나하나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그 이름 앞에는 늘 ‘대사 장인’, ‘히트 메이커’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정작 떠오르는 건, 화면 속에서 오래 남아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이었다.


김은숙의 드라마를 본다는 건, 한 시대의 감정을 함께 통과하는 경험 같았다. 누군가는 연애 초기에 “나 너 좋아하냐?”라는 대사를 흉내 내며 웃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죽어도 너 따라간다”는 말에 울컥했을 것이다. 몇 해가 지나도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인용되는 대사들, 그것이 그의 세계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 웃음기 없는 복수극은 낯설면서도 강렬했다. 문동은이라는 이름이 곧 상처와 의지를 뜻하게 될 정도로, 드라마는 묵직한 흔적을 남겼다. 차갑고 잔혹한 이야기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김은숙의 힘을 보여 주는 일이기도 했다.

22.jpg 사진=유튜브 'SBS 옛날 드라마 - 빽드'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크릿 가든’이 있다. 거품 가득한 욕조에서의 키스 장면은 지금도 농담처럼 회자된다. 영혼이 바뀐다는 판타지 설정은 유치할 수 있었지만, 그의 손에선 설득력이 생겼다. 웃음을 주고 눈물도 안기는 장면들이 겹겹이 쌓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또 하나의 이름, ‘상속자들’. 반짝이는 교복 차림의 고교생들이 펼쳐낸 사랑과 질투, 그 안에 녹아든 계급과 고독의 그림자는 지금 돌아봐도 선명하다. 단순히 화려한 청춘물이 아니라, 누구나 느꼈던 서툰 감정을 포착해낸 작품이었다. “나 너 좋아하냐?”라는 대사 하나로 세상이 멈춘 듯한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33.jpg 사진=유튜브 'SBS'

‘태양의 후예’는 장르의 경계를 넓혔다. 군인과 의사가 만들어낸 사랑 이야기는 재난과 분쟁이라는 무거운 배경 위에서도 단단히 빛났다. 화면 가득 펼쳐진 해외 로케이션, 긴장과 멜로가 교차하는 대사들, 그리고 그 시절을 통째로 삼켜버린 열기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어느 집 거실에선 가족이 함께 웃고, 또 다른 집에선 누군가 눈시울을 붉히며 보던 장면이 동시에 존재했을 것이다.

44.jpg 사진=유튜브 'KBS Drama Classic'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도깨비’. 불멸과 죽음을 오가며 쌓아 올린 서사는 한국 드라마의 세계관을 새롭게 열었다. 촛불 하나에 켜지고 꺼지는 운명, 저승사자의 눈빛, 그리고 도깨비 신부의 순수한 목소리.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과 기억이란 주제를 다시 배우게 됐다. 시청률 기록보다 오래 남는 건, 그 장면들이 만든 감정의 무게일 것이다.

55.jpg 사진=tvN 홈페이지

돌이켜보면, 김은숙의 드라마는 늘 그 시절의 대화를 채워 넣었다. 친구와 장난처럼 흉내 내던 말투, 밥자리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장면 하나. 작품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건, 결국 그 순간의 감정이다.


이제 곧 또 다른 이야기가 찾아온다. 제목부터 기묘한 울림을 가진 ‘다 이루어질지니’.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았는데도, 기대라는 단어가 먼저 따라붙는다. 아마 이번에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며,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 기억할 대사를 발견하겠지.


김은숙의 세계는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우리의 일상과 감정을 스쳐 지나가며,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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