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의 세계,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아침 지하철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였다. 두 사람이 ‘다 이루어질지니’를 기다린다며, 김은숙 작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단어 하나하나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그 이름 앞에는 늘 ‘대사 장인’, ‘히트 메이커’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정작 떠오르는 건, 화면 속에서 오래 남아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이었다.
김은숙의 드라마를 본다는 건, 한 시대의 감정을 함께 통과하는 경험 같았다. 누군가는 연애 초기에 “나 너 좋아하냐?”라는 대사를 흉내 내며 웃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죽어도 너 따라간다”는 말에 울컥했을 것이다. 몇 해가 지나도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인용되는 대사들, 그것이 그의 세계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 웃음기 없는 복수극은 낯설면서도 강렬했다. 문동은이라는 이름이 곧 상처와 의지를 뜻하게 될 정도로, 드라마는 묵직한 흔적을 남겼다. 차갑고 잔혹한 이야기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김은숙의 힘을 보여 주는 일이기도 했다.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크릿 가든’이 있다. 거품 가득한 욕조에서의 키스 장면은 지금도 농담처럼 회자된다. 영혼이 바뀐다는 판타지 설정은 유치할 수 있었지만, 그의 손에선 설득력이 생겼다. 웃음을 주고 눈물도 안기는 장면들이 겹겹이 쌓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또 하나의 이름, ‘상속자들’. 반짝이는 교복 차림의 고교생들이 펼쳐낸 사랑과 질투, 그 안에 녹아든 계급과 고독의 그림자는 지금 돌아봐도 선명하다. 단순히 화려한 청춘물이 아니라, 누구나 느꼈던 서툰 감정을 포착해낸 작품이었다. “나 너 좋아하냐?”라는 대사 하나로 세상이 멈춘 듯한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태양의 후예’는 장르의 경계를 넓혔다. 군인과 의사가 만들어낸 사랑 이야기는 재난과 분쟁이라는 무거운 배경 위에서도 단단히 빛났다. 화면 가득 펼쳐진 해외 로케이션, 긴장과 멜로가 교차하는 대사들, 그리고 그 시절을 통째로 삼켜버린 열기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어느 집 거실에선 가족이 함께 웃고, 또 다른 집에선 누군가 눈시울을 붉히며 보던 장면이 동시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도깨비’. 불멸과 죽음을 오가며 쌓아 올린 서사는 한국 드라마의 세계관을 새롭게 열었다. 촛불 하나에 켜지고 꺼지는 운명, 저승사자의 눈빛, 그리고 도깨비 신부의 순수한 목소리.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과 기억이란 주제를 다시 배우게 됐다. 시청률 기록보다 오래 남는 건, 그 장면들이 만든 감정의 무게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김은숙의 드라마는 늘 그 시절의 대화를 채워 넣었다. 친구와 장난처럼 흉내 내던 말투, 밥자리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장면 하나. 작품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건, 결국 그 순간의 감정이다.
이제 곧 또 다른 이야기가 찾아온다. 제목부터 기묘한 울림을 가진 ‘다 이루어질지니’.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았는데도, 기대라는 단어가 먼저 따라붙는다. 아마 이번에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며,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 기억할 대사를 발견하겠지.
김은숙의 세계는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우리의 일상과 감정을 스쳐 지나가며,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