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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만의 귀환에도… 주말 무대서 고전하는 신작

경쟁작의 벽에 가려진 조용한 출발

by 이슈피커

마트 계산대에 서 있는 여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다. 삶의 무게가 얹힌 듯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드라마 속 은수도 그랬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내려는 사람이었지만, 그 평범함조차 지켜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2.jpg 사진= 유튜브 ‘KBS Drama’

며칠 전 나는 이영애라는 이름에 끌려 tvN의 화제작 ‘은수 좋은 날’을 눌렀다. 26년 만의 복귀라는 말이 화면 밖에서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첫 회가 끝난 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배우의 얼굴은 여전히 단정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런데 시청률은 뜻밖의 숫자를 찍었다. 3.7%. 이튿날엔 더 내려앉아 3.4%였다. 황금 시간대에 편성된 기대작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 숫자는 유난히 초라했다.


생각해보면 이 시간대는 늘 만만치 않았다. 주말마다 강호처럼 버티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고, 한창 기세를 올린 경쟁 드라마가 있었다. tvN에서 방영 중인 ‘폭군의 셰프’는 이미 절정의 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SBS의 ‘미운 우리 새끼’는 여전히 습관처럼 켜는 집들이 많았다. JTBC의 프로그램마저 고정 시청층을 붙잡고 있었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란 생각보다 더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3.jpg 사진= 유튜브 ‘KBS Drama’

시청률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보면, 드라마 자체는 꽤 묵직한 주제를 안고 있었다. ‘은수 좋은 날’은 마약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중심에 세웠다. 남의 집 이야기처럼만 들리던 단어가 우리 사회의 그림자가 되었음을 드라마는 집요하게 보여주려 했다. 평범한 가정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이 무엇을 지켜내려 하는지를 묻는다.


이영애가 연기하는 은수는 이름처럼 평범한 주부다. 은행 계약직에서 정직원 전환에 실패하고, 결국 마트 계산대에 서게 된 인물. 그곳에서 만난 남편과 가정을 꾸렸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은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딸은 자퇴서를 내밀었다. 집조차 담보로 빼앗길 위기에 몰리자 은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나님, 나 그동안 착하게 살았으니까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 그녀의 대사는 단순한 호소가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의 절규처럼 들렸다.

4.jpg 사진= 유튜브 KBS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는 아직 2회밖에 지나지 않았다. 총 12부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본격적인 전개는 이제 시작이다. 그럼에도 초반의 무게감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드라마를 보고 나왔을 때, 인터넷에서는 이렇다 할 이야기조차 오르내리지 않았다. 클립 영상은 조회수가 희미했고, 커뮤니티 반응도 조용했다. 요즘 드라마에게 가장 절실한 ‘입소문’이 보이지 않았다.

5.jpg 사진= 유튜브 KBS 공식 홈페이지

그러나 작품 속에는 여전히 작은 불씨가 남아 있다. 단순히 범죄극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고단한 몸부림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결국 인물의 진심에 끌리는 법이다. 지금은 경쟁작의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어느 순간 은수의 이야기가 시청자들 마음에 닿는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끝내 좋은 날을 보여줄까. 아니면 제목과 달리, 나쁜 날의 기록으로만 남게 될까.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주말 저녁, 채널을 멈춰 세운 내 시선처럼, 누군가의 마음도 서서히 머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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