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민종, 시간의 무게를 걷다
늦은 밤, 책장에서 우연히 꺼낸 낡은 CD 한 장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친구들과 함께 따라 부르던 발라드가 담긴 앨범.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 시절 텔레비전 속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던 얼굴과 겹쳐졌다. 드라마 주제가를 직접 부르던 배우. 장면과 노래가 하나로 엮여, 한 세대를 감싸던 시간의 공기를 다시 불러냈다. 그 이름, 김민종.
세월은 흘렀지만 기억 속 이미지는 또렷하다. 한때는 안방극장을 장악했던 스타였고, 또 한때는 노래방 화면 속에서 늘 반주를 이끌던 가수였다. 시간이 흐르며 화면에서 멀어진 듯했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에는 어떤 힘이 남아 있었다. 이제 그는 스크린으로 돌아온다. 영화 ‘피렌체’. 무려 20년 만의 귀환이다.
공개된 짧은 영상 속 김민종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거리 위를 묵묵히 걸어간다. 검은 정장 차림, 무겁게 잠긴 표정. 대사를 하지 않아도, 그 얼굴이 품은 시간이 화면을 채운다. 팬들이 기다린 건 바로 이런 순간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배우가 보여주는 또 다른 표정.
연출을 맡은 이창열 감독은 김민종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했다고 했다.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거라는 예감. 작품은 단테의 삶을 모티프로 삼아 인간의 여정을 따라간다. 질문은 단순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그 물음은 언제나 쉽지 않고, 답은 늘 달라진다.
김민종이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은 단순한 캐스팅 기사 이상의 울림이 있다. 그는 1988년 영화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고, 90년대 드라마와 음악을 넘나들며 ‘만능’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느낌’, ‘머나먼 나라’, ‘미스터Q’, ‘수호천사’. 작품마다 시청률과 화제를 몰고 다니던 시절, 그의 얼굴은 곧 대중문화의 풍경이었다. 김희선과 함께한 수많은 드라마 속 연인은 지금도 회상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한동안의 공백은 길었다.
그러나 ‘신사의 품격’에서 그는 성숙한 얼굴로 다시 주목받았다. 나이를 더한 배우는 이전보다 차분했고, 무게를 품었다. 이번 영화가 궁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 비워낸 시간 동안 쌓인 깊이를,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드러낼지.
이번 작품에는 예지원이 함께한다.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늘 자기만의 자리를 지켜온 배우. 섬세한 감정으로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자연스레 기대를 불러온다. 여기에 튀르키예 배우 세라 일마즈가 특별 출연하며 이야기에 다른 결을 더한다.
‘피렌체’는 결국 예술과 삶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아내려 한다. 관객에게 잊고 지낸 질문을 되묻는다. 살아가는 이유와 그 무게, 그리고 선택. 김민종이 맡은 주인공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20년 만의 귀환을 기다리는 마음은 단순한 향수에서 오지 않는다. 한 시대를 함께 지나온 배우가 다시 새로운 길을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시간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스크린 위에 선 그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처럼 서 있다.
그의 표정 속에 담긴 고요한 질문이, 극장을 찾은 우리 모두에게 다른 빛으로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