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서사, 다시 만난 다섯 편의 드라마
하루가 길게 늘어지는 날이면, 괜히 옛 드라마들을 떠올리게 된다. 몇 년 전 그 긴장감에 심장이 조여오던 장면들, 대사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맴도는 순간들. 특히 복수극은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배신이 터지고, 음모가 얽히며, 권력 앞에서 무너졌다 다시 일어서는 인물들. 억눌린 감정이 한순간 폭발하는 장면은 보는 이에게도 묘한 해방감을 준다.
스크린 너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도, 마치 내 일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불안하게 떨던 숨결이 차갑게 굳는 순간, 주인공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그때의 전율은 오래 간직된다. 그래서인지 복수극은 늘 다시 소환하고 싶은 장르다. 몇 편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
KBS 2TV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2012).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내던졌던 남자가, 그 사랑의 배신으로 차갑게 굳어가는 이야기다. 강마루는 연인을 위해 살인죄까지 뒤집어썼지만 돌아온 건 배신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여자를 이용해 복수를 꾀한다. 차갑게 계산된 선택이었지만, 기억을 잃은 서은기와 마주한 순간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흔들린다. 음모가 쉴 새 없이 몰아쳤던 이 드라마는 한때 ‘막장’이라 불리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을 가졌다.
MBC 〈빅마우스〉(2022).
승률 10%에 불과하던 변호사가 하루아침에 희대의 사기꾼으로 몰린다. 박창호는 교도소에 갇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 안에서 거대한 음모의 실체와 마주한다. 아내 고미호는 남편을 지키려 스스로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고, 권력자들과 맞선다. ‘진짜 빅마우스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했던 작품. 사회의 그림자를 드러내며 마지막 회까지 시청자들을 붙잡았다.
tvN 〈빈센조〉(2021).
마피아 변호사가 한국 땅에서 다시 맞닥뜨린 현실. 빈센조는 악을 악으로 무너뜨린다. 금가프라자의 세입자들과 함께 금괴를 지키며 벌이는 사투는 코믹하면서도 묘하게 씁쓸했다. 바벨그룹의 탐욕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 악역 장준우의 정체가 드러나던 순간, 드라마는 완전히 다른 긴장으로 돌입했다. 블랙코미디로 포장했지만, 실은 가장 잔혹한 복수극이었다.
SBS 〈천원짜리 변호사〉(2022).
천지훈은 수임료 1000원만 받는다. 능청스럽게 웃지만 법정에서는 누구보다 날카롭다. 억울한 의뢰인을 위해 재벌 사건을 파헤치고, 거대 권력에 맞선다. 웃음 뒤에 감춰진 과거, 연인의 비극까지 드러나며 이야기는 본격적인 복수극으로 틀어진다. 매회 다른 사건 속에서도 중심을 놓치지 않았던 건 ‘무너뜨려야 할 진실’이었다.
JTBC 〈재벌집 막내아들〉(2022).
죽임을 당한 비서가 재벌가 막내아들로 환생한다는 설정. 윤현우에서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난 그는 기억을 무기로 삼아 거대한 권력과 맞선다. 진양철 회장과의 대립은 가족의 갈등을 넘어 세대의 충돌을 보여줬다. 미래를 꿰뚫는 듯한 통찰로 순양그룹을 흔들던 장면은 통쾌했고, 동시에 서늘했다. 회귀와 복수가 결합된 이 이야기는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오래 회자됐다.
복수극은 단순히 맞대결만 그리지 않는다. 사랑이 배신으로 뒤집히고, 믿음이 의심으로 변하는 순간 인간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어떤 이는 끝내 화해를 택하고, 또 다른 이는 끝까지 치열하게 싸운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묘한 해방감을 맛본다.
이 다섯 편의 드라마는 저마다 다른 색을 띠었지만, 모두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꺼내 보아도 여전히 서늘하고, 여전히 매혹적이다. 언젠가 또 다른 복수극이 등장한다 해도, 이 작품들이 남긴 긴 여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